[신현배 작가의 국보·보물 이야기] 숭례문(상)

  • 프린트하기
  • 이메일보내기
  • 기사목록
  • 스크랩하기
  • 블로그담기

입력 : 2009.03.05 09:29

중국 사신만 드나들었던 서울 정문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도읍지를 한양(서울)으로 옮기고 정도전에게 도성 쌓는 일을 맡겼습니다. 정도전은 도성을 어디에 쌓을까 밤늦도록 고민했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간밤에 눈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도성 안쪽에는 어느새 눈이 녹았는데, 도성 바깥쪽인 먼 산에는 눈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마치 능선을 따라 줄을 그어 놓은 것 같았습니다. 정도전은 눈이 남아 있는 선을 따라 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을 잇는 성을 쌓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의 도읍지인 한양은 ‘눈의 울타리’, 즉 ‘설울’(雪城)을 따라 도성을 쌓았다고 해서 ‘설울’이 변하여 ‘서울’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1396년 도성 쌓는 공사를 하여 45리에 이르는 성이 완성되었는데, 동서남북에 도성 출입을 위한 큰 문 네 개와 작은 문 네 개를 두었습니다. 큰 문 네 개를 ‘사대문’이라고 부르는데, 남대문·동대문·서대문·북문 등이 그것입니다.


정도전은 유교의 기본 이념인 인(仁)·의(義)·예(禮)·지(智)를 살린다는 뜻에서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으로,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으로, 북문은 ‘소지문(炤智門·뒤에 숙정문으로 변경)’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사대문 가운데 서울 도성의 정문은 숭례문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중국 사신들만이 이 문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으며, 일본 사신은 광희문, 여진 사신은 혜화문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그림=양동석
그림=양동석

숭례문 현판의 이름 석 자를 쓴 사람은 태종의 맏아들이자 세종의 형인 양녕 대군이라고 합니다. 양녕 대군은 태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 안에 있는 경회루 현판 글씨를 썼을 만큼 어려서부터 명필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뒷날 ‘서성(書聖)’이라고까지 불리는 완당 김정희는 과천에서 서울로 드나들 때마다, 숭례문 앞에 우뚝 선 채 숭례문 현판 글씨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답니다.


숭례문 현판 글씨는 다른 도성 문 현판과는 달리 세로로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숭례문’의 ‘예(禮)’자가 오행으로 ‘화(火)’, 즉 불을 상징하고, ‘숭(崇)’자는 예서로 불꽃이 치솟는 모양이니, 현판 글씨를 세로로 써서 불이 타오르는 형상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불의 산’이라는 관악산의 불기가 서울 도성까지 미치지 못하도록 맞불을 놓은 것이지요.


또 다른 이유는 숭례문이 귀한 손님이 드나드는 서울 도성의 정문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귀한 손님을 서서 맞이함이 예의에 맞는다고 현판 글씨를 세로로 써 놓았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숭례문이 문 양쪽에 성벽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07년에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황태자가 숭례문을 통해 서울 도성으로 들어오지 않겠다고 해서, 양쪽 성벽을 헐어 길을 내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숭례문은 섬처럼 외따로 남게 되었습니다. <하편에 계속>
 


숭례문은…
우리나라 국보 제1호로, 서울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문 건물이다. 서울 도성 남쪽에 있어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1398년(태조 7년) 2월에 완성됐고, 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에 고쳐 지었다. 성종 때를 기준으로 해도 500년이 넘고,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축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로, 화강암의 홍예문(무지개 모양의 문)을 중앙부에 낸 거대한 석축 위에 세워졌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돼 있다.


숭례문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 전쟁 등의 큰 전쟁을 겪으면서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2008년 2월 10일, 어이없는 화재로 탔다. 2층이 일부 훼손되었지만, 1층과 기단 및 현판이 훼손되지 않아 현재 원형대로 복구하는 중이다.


 / 소년조선일보·현문미디어 공동기획

  • Copyright ⓒ 어린이조선일보 & Chosun.com
  • 제휴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