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양동석

1592년(선조 25년) 6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전주성에서는 전라 감사 이광과 전주 부윤 이정복, 그리고 경기전 참봉 오희길, 유인 등이 심각한 얼굴로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라 감사 이광이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왜군이 금산까지 쳐들어왔다고 하오. 그들은 남원을 거쳐 전주성으로 진격해 올 것이오. 전주성을 빼앗기게 되면 전주 사고에 보관 중인 ‘조선왕조실록’이 위험하오.”

당시에는 태조로부터 명종 때까지 13대 조선 왕조의 역사를 자세히 기록한 800여 권의 책을 서울 경복궁의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의 사고에 각각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춘추관과 충주 사고에만 보관하다가 세종 때부터 성주･전주에도 사고를 마련해 보관해 왔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성주･충주･춘추관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불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성주와 충주는 왜군에 의해 피해를 보았고, 춘추관은 백성들이 경복궁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변해 버렸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전주 사고에 있는 ‘조선왕조실록’뿐이었습니다.

“왜군이 도착하기 전에 ‘조선왕조실록’을 안전한 곳에 숨깁시다. 800여 권이나 돼 다른 곳에 옮기기 어려우니 땅에 파묻어 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주 부윤의 제의에 전라 감사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좋은 방법이 아니오. 성주 사고에서 왜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땅속에 묻었지만 결국 발각돼 약탈당하거나 불에 타 없어졌다더군.”

“그렇습니다. 경상도 금산에서 사로잡은 왜군 포로의 몸에서 ‘조선왕조실록’ 두 장이 나왔다고 합니다.”

“인적이 드문 깊은 산 속에 감춰 두는 게 어떨까요?”

“옳지, 그게 좋겠군. 깊은 산 속이 안전하겠어.”

전라 감사는 경기전 참봉에게 어느 곳이 좋을지 장소를 알아보도록 명령했습니다.

전주 사고에 있는 경기전은 태조의 영정(족자로 된 초상화)을 보관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태조 영정도 함께 옮기기로 했습니다.

경기전 참봉은 몇 군데 장소를 알아보고 나서 전라 감사에게 보고했습니다.

“정읍의 내장산은 깊고 험하여 사람들이 오르기 어려운 산이지요. 내장산 금선폭포 근처에 은봉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그곳에 보관했으면 합니다. 좀 더 들어가면 용굴암이 나오는데, 태조대왕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은 그곳에 모시는 것이 안전합니다.”

“수고했네. 그럼 내장산으로 ‘조선왕조실록’과 태조대왕의 어진을 서둘러 옮기도록 하게.”

“전주에서 내장산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게다가 책이 800여 권이나 됩니다. 왜군이 곧 전주성에 들이닥친다고 모두 피란을 가느라 정신이 없는데 누가 그 많은 책을 옮기겠습니까?”

“그렇다면 선비들 가운데 이 일을 도울 만한 사람은 없는지 찾아보게.” <하편에 계속>

세계서 가장 오랫동안의 역사 기록한 책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의 역사를 왕별로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책이다. 총 1893권 888책으로, 1997년 국보 제70호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선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중국 실록인 대청역조실록이 296년, 황명실록이 260년으로, 472년이라는 역사 기록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조선 시대의 정치･군사･제도･법률･경제·풍속 등 모든 분야를 담은 귀중한 기록 유산이기도 하다.

실록은 왕이 죽으면 다음 왕 때에 실록청을 설치해 편찬했다. 왕과 그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사초’와 ‘승정원일기’, ‘의정부일기’ 등을 참고했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조선왕조실록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이 책들이 일본 강점기에 만들어졌고 왜곡된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