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위인전] 전재산 '578억원' 환원한 기부왕 류근철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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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1.11 09:52

8평 방 묵으며 환자 무료 진료 '신약 연구 꼭 성공해 교수·학생들 지원할 것'

류근철 박사(85세)의 명함은 화려하다. 한의학박사, 의공학박사, 카이스트(KAIST) 초빙특훈교수, 닥터류 헬스클리닉 원장…. 그러나 그를 가장 빛나게 해주는 수식어는 ‘기부왕’ 이다. 지난 2008년 카이스트에 578억원을 기부한 그는“요즘도‘어떻게 하면 더 많은 걸 사회에 돌려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고 했다.


◆카이스트서 무료 진료 펼치며 신약 연구 몰두


사람들은 날 ‘기부왕’ 이라고 불러요.카이스트에 전 재산을 기부한 후부터지요. 당시 국내 개인 기부 중에선 최고 액수였어요. 당분간 깨지기 어려운 기록일 거라고들 하더군요.


요즘 난 카이스트 게스트하우스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면적이 26.5㎡(8평)쯤 되는 좁은 방이죠. 식사도 학생 식당에서 해요.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교내에 있는 ‘닥터류 헬스클리닉’ 에서 몸이 아픈 학생과 일반인을 치료하고 신약 연구에 몰두하고 있거든요.


물론 진료비는 무료예요. 일종의 ‘재능기부’ 인 셈이죠. 지금 진행 중인 연구역시 목표는 하나예요. 꼭 성공해 교수들에겐 연구비를, 학생들에겐 장학금을 지원하는 거지요.

	류근철 박사는 전 재산을 기
부한 후 카이스트 기숙사에
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는“기부를 한 후 몸
도, 마음도 가벼워졌다”고
말했다. /대전=남정탁 기자
jungtak2@chosun.com
류근철 박사는 전 재산을 기 부한 후 카이스트 기숙사에 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는“기부를 한 후 몸 도, 마음도 가벼워졌다”고 말했다. /대전=남정탁 기자 jungtak2@chosun.com

◆‘사과 궤짝 책상’ 으로 공부방 꾸며 30명 지도


어린 시절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어요.


고향인 충남 천안에서 얼마 살지도 못한 채 쫓겨났지요. 3'1 만세운동에 참가하신 부모님에 대한 일본 헌병들의 감시가 심했거든요. 어머니는 고문을 심하게 당해 정신분열증을 앓기도 했어요. 결국 다섯 살 때 충북 충주 노은면으로 옮겨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숨어 살았어요.


부모님은 날 학교에 보낼 형편이 안 됐어요. 하지만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열한 살 때 무작정 가까운 초등학교에 찾아가 “공부 좀 시켜달라” 고 간청했어요.그렇게 그해‘ 늦깎이 1학년’ 이 됐어요.


어릴 땐 공부를 무척 좋아했어요. 리더십도 강한 편이었고요. 당시 주워온 사과 궤짝으로 책상을 길게 만들어 집에 공부방을 꾸몄어요. 남포등(석유를 넣은그릇 심지에 불을 붙이고 유리 덮개를 씌운 등) 두 개를 천장에 매달아 불을 밝힌 후 동네 아이들 30여 명을 모아 공부를 시켰어요. 나보다 상급생도 더러 있어 공부방 회장 자리를 두고 다투기도 했지요. 하지만 절대 양보하지 않았어요.


◆공학박사 꿈꾸며 ‘工’ 자 붙이고 다니던 소년


어려서부터 만들기를 좋아했어요. 소질도 있어 곧잘 ‘작품’ 을 만들어냈지요.


함석을 오려 만든 자동차, 철사를 꼬아만든 스케이트…. 4학년 때부턴 ‘장인공(工)’ 자를 함석으로 오려 가슴에 붙이고 다녔어요. 선생님들은 그게 뭐냐며 당장 떼어버리라고 핀잔을 줬어요. 하지만 난 고집을 피웠지요.“ 난 공학박사가 될 거예요!” 하면서요.


내가 생각해도 좀 유별난 데가 있었어요. 초등생 때 일본에 책을 주문해 볼 정도로 조숙했죠. 주로 교과와 관련된 책, 혹은 학술 잡지였어요. 책값은 헌 양은그릇이나 깨진 솥, 다 해진 고무신 같은 걸 주워 고물장수에게 팔아 마련했어요. 친구들은 고물을 엿과 바꿨지만 난 그 돈으로 책을 사 본 거예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엔 일본으로 가제철회사에 취직했어요.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안 됐거든요. 1년 반 정도 일본에서 머물며 중·고교 과정을 혼자 뗐어요. 의학계에 발을 들여놓은 건 스무살 되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 후 였어요.


◆300억 재산 “좋은 데 시집 보내야겠다” 생각


서울에서 의사 공부를 할 땐 돈이 없어 하루 한 끼만 먹었어요. 그래도 젊어 그런지 물만 먹어도 기운이 펄펄 나더군요.(웃음) 엄청난 고생 끝에 한의대를 졸업한 게 서른 살 때였어요.


한번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절대 꺼내지 않았어요. 악착같이 모으다 보니 한 푼 두 푼 쌓이더군요. 어느 날 보니 재산이 100억원으로 불어 있었어요. 이제 나도 살 만하구나, 싶었어요.

200억원을 모았을 땐 나도 이제 부자구나, 했지요. 그런데 300억원이 되자 덜컥 겁이 났어요. 내 돈이 아니란 생각이 든 거예요. ‘ 좋은 곳에 시집 보내달라고 온 돈’ 이란 생각에 그때부터‘내 재산 혼처(婚處'혼인할 자리)’ 를 찾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내게 자주 물어요. 한의학으로 번 돈을 왜 카이스트에 기부했느냐고요. 한의학이 있는 것도 모두 조국이 있기 때문이에요. 옛날엔 ‘군대 몇 명,무기 몇 대’ 로 국력을 가늠했어요. 하지만 오늘날 국력은 곧 그 나라의 과학 수준이지요. 과학자가 대접받는 나라가 선진국인 세상이 된 거예요. 난 내 돈이 우리나라의 과학 수준을 높여 국력을 강하게 하는 데 밑거름이 되길 바라요. 게다가 카이스트는 온 국민이 주인인 곳 이잖아요. 나 역시 국민의 한 사람이니까 여기에 시집 보낸 돈은 영원히 내 소유이기도 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린이들, “ 꼭 인재 되겠다” 큰 뜻 품어야


돌이켜보면 셋방살이하던 시절에도 큰돈은 아니지만 고향에, 모교에 장학금을 보냈어요.‘ 나눔 정신’ 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거예요. 어머니는 여자거지를 위해 직접 움막집을 지어주셨고,하루 한 끼는 더운 밥을 짓고 된장국을 끓여 갖다주셨어요. 나도 그 심부름을 여러 번 했죠. 갑자기 거지들이 찾아와 밥을 달라고 하면 당신 끼니를 대신 내어주곤 하셨어요.


요즘 부모들은 자식을 너무 귀하게 키우는 것 같아요. 자기 아이 안 귀한 부모가 어딨겠어요. 하지만 정말 자식을 위한다면 귀여워하는 건 속으로만 해야해요. 겉으론 평범하게, 아니 엄격하게 대해야지요. 그래야 아이가 강하게 클 수 있으니까요.


어린이는 큰 뜻을 품어야 해요.‘ 지금은 비록 어리지만 언젠가 꼭 이 나라에 필요한 인재가 되겠다’ 는 생각을 가지세요. 목표를 크게 두고 따라가다 보면 꿈은 반드시 이뤄지기 마련이에요.

>> 류근철 박사는


26년 충남 태안에서 태어나 경희대에서 한의학을 공부했다. 1972년 세계 최초로 침 마취를 활용, 자궁근종 수술을 성공시켜 1976년 ‘국내 제1호 한의학박사’ 가 됐다. 잦은 대기권 출입으로 인한 우주비행사의 신체 충격을 치료하는 의료기기 ‘헬스부스터’ 를 개발, 러시아 모스크바공과대학에서 의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 2008년 평생 모은 재산 578억원을 카이스트에 기부했다. 현재 카이스트 초빙특훈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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