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을 위해 살았다면 지금과 같은 행복은 못 느꼈을 거예요.” 그는 이렇게 말한 뒤 너털웃음을 지었다. 편안하고 둥글둥글한 인상이 꼭 이웃집 할아버지를 닮았다. 박종삼 한국월드비전 회장(75세) 얘기다. 그는 이제껏 독신으로 지내는 이유에 대해 “결혼을 했다면 지금처럼 남을 돕는 데 내 모든 걸 쏟아붓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평생을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살아온, 아름다운 그의 이야기가 지금 시작된다.

◆공부도, 노는 것도 1등이었던 ‘다케하라 소상’

난 3남 1녀 중 셋째였어요. 위로 형이 둘 있고 밑으로 여자 동생이 하나 있었죠. 고향은 현재 북한 땅인 황해도 신천이에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나라는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어요. 난 신사참배(神社參拜·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우리의 종교와 사상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일본 사당에 예를 갖춰 절하도록 강요하던 일)도 해야 했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꿔야 했지요. 내 일본식 이름은 ‘다케하라 소상’이었어요. 우리 집은 기독교 집안이었는데, 어머니는 항상 일본군이 물러가고 독립이 됐으면 좋겠다며 뒤뜰에서 기도하곤 하셨어요.

난 어렸을 때 꽤 똑똑한 편이었어요. 국민학교(요즘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형들 어깨너머로 일본어를 다 깨우쳤을 정도니까요. 학교에 들어가서도 항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답니다. 노는 것도 무척 좋아했어요. 주로 친구들과 제기차기나 딱지치기, 썰매 타기 등을 하며 자연 속에서 뛰놀았죠.

어렸을 때 기억 중 가장 잊히지 않는 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집에 쌀을 꾸러 온 일이에요. 우리 집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쌀을 꿔주자고 하셨죠. 하지만 아버지는 반대하셨어요. 우리 식구 먹을 것도 부족하다면서요. 당시 전 아버지에게 왜 안 꿔주려고 하시냐며 대들었답니다. 나이가 들고서야 비로소 아버지 심정을 이해했어요. 가족을 위해, 날 위해 꿔주지 못하신 거였단 걸요.

◆홀로 떠난 피란길서 사고당해… 기적적 회생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터졌어요. 난 친구들과 배를 타고 남쪽으로 피란을 떠났어요. 그때가 아마 만 열네 살 때였을 거예요. 가족은 모두 집에 남아있었어요. 식구가 많아 한꺼번에 떠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내가 타고 가던 배가 그만 인천 앞바다에서 침몰해버렸어요.

물이 쏟아져 들어올 땐 꼭 죽는 줄 알았죠. 무서워 벌벌 떨며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날 살려주면 오로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요. 천만다행으로 부서진 배가 밀리고 밀려 이작도란 섬 근처에 가라앉았어요. 차가운 겨울 바다를 헤엄쳐 섬에 닿았고 겨우 살아났죠. 그때 결심했어요. 새로 얻은 생명을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위해 쓰겠다고요.

◆배추 시래기 주워 먹던 소년, 치과의사가 되다

가족 한 명 없이 남쪽에서 살아가는 건 쉽지 않았어요. 전쟁 중엔 미군부대를 전전하며 일을 돕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 생활했어요. 남은 돈은 모두 저 같은 피란 가족들이나 어려운 처지인 사람들에게 줬습니다. 미군부대에서 일할 당시 영어책을 구해 혼자 공부하기도 했어요. 독학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중학교 수준의 교재를 읽을 정도가 됐죠.

1953년 휴전이 되면서 북쪽의 가족에겐 아예 돌아갈 수 없게 됐어요. 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년 정도 학교를 쉬긴 했지만 공부를 잘할 자신이 있었거든요. 무작정 서울시내 학교들을 찾아다니며 날 받아달라고 부탁했어요. 하지만 어느 학교도 날 거들떠보지 않았죠. 딱 한 곳, 서울 한영고등학교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2학년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당시 난 독립문 근처 땅굴에 살면서 왕십리에 있는 학교까지 걸어 다녔어요. 신발도 없이 맨발로 말이에요. 춥고 배고파 시장에 떨어진 배추 시래기를 주워 끓여 먹곤 했어요.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3 땐 학년 전체에서 1등을 했답니다. 그리고 서울대 치과대학에 들어갔어요.

대학 졸업 후 치과의사로 살면서 늘 남을 위해 일하려면 더 많은 걸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신학과 사회사업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건 그 때문이에요.

귀국한 후엔 광주에 땅을 사서 소년원에서 나온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보살폈어요. 그들이 또다시 깡패가 되지 않도록 보살폈죠. 교수(숭실대학교)로 일하며 번 돈 등을 모두 그들에게 썼어요. 그들에게 난 아버지였고, 내게 그들은 자식이었거든요.

◆“고마워하고 나눌 줄 아는 어린이가 되세요!”

여러 방면의 사회봉사에 힘쓰며 살던 지난 2003년, 한국월드비전에서 연락이 왔어요. 회장직을 맡아달라고요. 무척 영광이었지만 내가 맡기엔 너무 과분한 자리가 아닐까, 걱정도 됐어요. 결국 회장직을 수락(受諾·요구를 받아들임)했고 올해가 벌써 9년째네요. 난 올해를 마지막으로 회장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에요. 앞으론 교회 사회봉사 연구소를 만들고 더 많은 사람을 돕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려고 해요.

내가 어린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현재 상황에 고마워할 줄 하는 사람이 되라는 거예요. 월드비전 회장 일을 하며 세계 곳곳을 참 많이 돌아다녔어요. 세 곳 중 한 곳의 어린이는 학교에 다니긴커녕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 채로 살아갑니다. 아프리카 어린이들은 내리는 비를 피할 데도 없어 그 비를 다 맞아가며 공부를 하죠. 공책이 없어 땅바닥이나 벽돌을 까맣게 칠해 사용하는 아이들도 많아요.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얼마나 행복한지요.

고마움을 안 후엔 나눔을 실천했으면 좋겠어요. 세계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들이 많거든요. 그 친구를 돕기 위해 작은 기부나 실천부터 해나가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박종삼 한국월드비전 회장은…

1936년 10월 1일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에서 태어나 서울 한영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대학원(Prinston Theological Seminary)과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대학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각각 신학 석사와 사회사업학 박사를 수료했다. 1982년 한국사회사업대학 협의회장을, 1995년 한국사회복지학회장을 각각 맡았다. 1979년부터 2001년까지 숭실대 사회사업학과 교수를 지냈다. 2003년부터 줄곧 맡아온 사회복지법인 한국월드비전 회장직에서 올해 말 물러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