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태어났어요. 출생부터 대단했죠. 내가 태어난 날 온 나라 국민이 집집이 태극기를 내걸었거든요. 왜냐고요? 그날이 개천절(10월 3일)이었어요. 하하….”

성우 인생 42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민 성우’ 배한성 교수(65세·서울예술대학 방송영상과)가 유쾌한 농담으로 지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요? 정말로 가난했죠. 꿈 하나로 버텨냈어요.” 옛 추억을 떠올리는 그의 목소리가 이내 떨려왔다.

“그래, 난 영화배우가 될 거야”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깜깜한 밤’부터 생각나요. 다섯 살 무렵 6·25 전쟁이 나서 어머니, 동생과 함께 경기 용인으로 피란을 갔어요. 양초 하나 사기 어려운 형편이었죠. 해가 뉘엿뉘엿 기울면 흐릿한 등잔불을 켜놓고 죽으로 끼니를 때웠어요. 그러곤 얼른 불을 끈 채 어둑해진 방에 세 식구가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어요.

어린 동생은 금세 곯아떨어졌지만 나와 어머니는 쉽게 잠들지 못했어요. 어머니도 심심했는지 여고 시절에 봤던 영화 얘길 종종 해주셨어요. 얼마나 재밌었는지 몰라요. 내가 눈을 반짝이면서 신나게 들으니까 어머니는 몸 연기, 목소리 연기까지 해가며 더 실감 나게 얘길 들려주셨죠. 매일 밤, 어머니 얘기 속에 나온 수많은 인물들이 내 상상 속에서 움직이고, 웃고, 울었죠. 새로운 세상이었어요.

초등 4학년 때 다시 서울로 왔어요. 을지로 쪽에 살게 됐는데 국도극장, 수도극장, 단성사, 계림극장 등 영화관이 무척 많은 동네였어요. ‘진짜 영화’를 보고 싶은 맘에 친구들과 몰래 극장에 숨어 들어갔답니다. 커다란 화면 위로 펼쳐지는 총천연색 영화를 본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그리고 결심했죠. 영화배우가 돼야겠다!

“신문 드릴 테니 영화표 주세요”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공부도 즐거웠답니다. 모르는 것, 궁금했던 걸 하나씩 알아간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거든요. 중학교에 들어갈 때도 1등으로 입학했어요. 덕분에 입학식에서 신입생 대표로 연설을 하게 됐죠. 어머니는 내가 자랑스러우셨나 봐요. 어떻게 구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입학식 날 아침 인절미 세 조각을 마련해 물 한 잔과 함께 내오셨죠. 든든히 먹고 큰 소리로 연설하라고요. 하지만 배고픈 동생과 어머니를 두고 나 혼자 그걸 먹을 수 있나요. 셋이 인절미 한 조각씩을 나눠 먹곤 집을 나서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요.

집안 형편은 점점 더 나빠졌어요. 중학생 때부턴 본격적으로 ‘가장’ 노릇을 해야 했죠. 아침저녁으로 신문배달을 하고, 초등생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정말 쉴 틈 없이 일하고 또 일했어요. 하지만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꿈만큼은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어요.

어느 날,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어요. 영화 홍보 포스터 붙이는 사람이 한 가게에 들어가 ‘가게 앞에 포스터를 붙이게 해달라’며 가게 주인에게 영화표를 건네는 거예요. 얼른 달려가 가게 주인에게 제안했죠. 매일 신문을 넣어줄 테니 영화표가 생길 때마다 내게 달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당돌했어요. 어쨌든 그 덕분에 당시 개봉 영화는 죄다 볼 수 있었어요.

“그 역할 제가 하고 싶어요”

“얘들아, 국어 교과서 라디오드라마 대본 ‘신숙주와 그 부인’으로 우리도 라디오드라마 한 번 만들어보자. 주인공은 누가 좋을까?”

“배한성이요!”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국어 시간이었는데 선생님 말씀에 아이들이 일제히 날 지목했어요. 평소 친구들에게 영화 얘길 자주 들려줬던 게 효과가 있었나 봐요. 그렇게 해서 수업 시간에 처음 성우 연기를 선보이게 됐어요. 제법 잘했는지 선생님과 친구들의 반응이 대단했어요.

내친김에 ‘일’을 저질렀어요. 우연찮게 임권택 감독의 시나리오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구하게 됐는데 거기 나온 ‘소년병’ 역할이 무척 탐났어요. 그래서 영화사에 ‘소년병 역할을 내게 달라’며 편지를 보냈어요. 영화사에선 ‘사진을 보내라’는 답장이 왔어요. 곧바로 사진관으로 달려갔어요. 비스듬히 앉아 영화배우처럼 멋진 표정을 지으며 ‘찰칵’ 사진을 찍었죠. 사진 보낸 지 열흘쯤 지나 다시 답장이 왔어요. ‘얼굴이 배역과 맞지 않습니다.’ 무척 실망했어요.

“하늘은 노력하는 자의 편”

성우가 되겠다고 결심한 건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어요. 당시 영화배우는 대부분 신성일 같은 ‘꽃미남’의 몫이었거든요. 내 얼굴론 아무래도 어렵겠다 싶었죠. 그래도 ‘목소리 배우’는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서라벌예술대학(지금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방송과에 입학해 성우의 꿈을 키우던 중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어요. 등록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 닥친 거예요. 그즈음, 마침 동양방송(TBC)에서 성우를 뽑는다는 공고가 났어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만난 느낌이었죠.

실기 시험을 보는데 대본을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어요. ‘꼭 합격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거든요.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요? 내게 떨어진 배역은 ‘복권 1등에 당첨된 사실을 아내에게 전화로 알리는 남편’ 역이었어요. 심사위원들은 심하게 떨리는 내 목소리를 ‘연기’로 받아들이더군요. 결과는 합격. 그렇게 무려 18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TBC 2기 성우가 됐어요.

성우가 된 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어요. 단역이든 주역이든 내게 온 배역은 수십 가지의 설정과 끊임없는 연구 끝에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죠. 만화영화 ‘컴퓨터 형사 가제트’, 외화 드라마 ‘맥가이버’, 영화 ‘아마데우스’의 주인공 목소리도 모두 그런 노력 끝에 탄생했답니다.

난 요즘 어린이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어요. 하지만 단 한 번도 내게 주어진 상황을 원망한 적이 없어요. 그저 매 시기 최선을 다해 노력했죠. 어찌 보면 ‘가난’이 내게 에너지를 준 것 같아요. 가난했기에 누구보다 성실했고 부지런했으니까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있나요? 부유한 가정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나요, 아니면 그 반대인가요? 어느 경우든 이것 하나만큼은 꼭 기억하세요. ‘하늘은 노력하는 사람의 편’이란 걸요.


>>> 성우 배한성은

1945년 서울 출생. 1966년 동양방송에서 성우로 데뷔했다. 코믹하면서도 지적인 목소리로 애니메이션, 라디오 연속극, TV 외화 시리즈 등에서 활약하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현재 한국성우협회 자문위원이며 서울예술대학교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