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잠시 보실래요? 방금 전 루마니아의 한 소녀가 페이스북으로 보내준 글이에요. ‘동이’에서 가장 감명 깊고 아름다웠던 장면에 대해 말하고 있죠. 놀랍게도 그 장면은 제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장면이랍니다. 제가 마음을 담아 만든 장면에 시청자들이 웃고 울고 행복해하는 것, 제겐 그만한 기쁨이 없어요.”

그는 이렇게 말한 뒤 수줍게 웃었다. 얼굴에 팬 주름 사이로 세월의 깊이가 느껴졌다. 드라마의 거장(巨匠·어떤 분야에서 특히 뛰어난 사람) 이병훈 프로듀서(PD·64세). ‘허준’(1999~2000년), ‘대장금’(2003~2004년) 등 숱한 명품 사극(史劇·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연극이나 드라마)이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됐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그의 눈은 드라마에 대한 열정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책과 영화를 사랑했던 ‘충청도 소년’
내 고향은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이에요. 2남 2녀 중 큰아들이었죠. 위로 누나가 한 분 있고 아래론 남동생과 여동생이 각각 하나씩 있어요.
일곱 살 되던 해에 6·25 전쟁이 터졌어요. 당시 우리 가족은 서울에 살고 있었죠. 아버지는 전쟁이 나자 밖을 둘러보겠다며 나가신 후 소식이 끊겼어요. 행방불명이 되신 거죠. 우리 가족은 커다란 슬픔을 안고 피란길에 올랐어요. 고향 전의면과 충남 서산 일대를 떠돌다가 초등 3학년 때 외가가 있는 인천으로 이사를 갔죠.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습니다.

어렸을 땐 동네 친구들과 주로 전쟁놀이를 하며 놀았어요. 전쟁 중이라 별다른 장난감도 없었죠. 요즘 어린이들처럼 축구 등 공놀이를 하는 건 꿈도 못 꿨어요. 공부는 곧잘 하는 편이었어요. 반에서 1등은 아니어도 2~3등은 했죠. 중·고교 6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다녔어요. 나보다 나이 어린 학생들이나 동급생들 공부를 가르쳐주며 틈틈이 용돈도 벌었죠.

중·고교 시절엔 책과 영화에 흠뻑 빠졌어요. 인천 자유공원 근처의 한 초등학교 담벼락에 있던 ‘간이 책 대여점’에서 매일 책을 빌려보곤 했죠. 누나와 함께 밤새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었어요. 할머니가 “기름 닳으니 얼른 자라”고 혼내셔서 창문 밖으로 불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이불로 막아놓고 책을 읽기도 했답니다. 없는 돈을 모아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을 찾기도 했지요.

◆‘허준’과 ‘대장금’으로 한국 알리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 끝에 서울대 임학과에 들어갔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취직이 잘 되는 공과대학을 들어가려고 했는데 보기 좋게 떨어졌죠. 임학과는 2지망이었어요.
졸업 후 취업할 곳을 이리저리 찾다가 우연히 MBC 방송사 시험을 보게 됐는데 덜컥 합격해버렸죠. 그때가 1970년이에요. 동료 PD들은 대부분 연극이나 영화 관련 공부를 한 친구들이었어요. 반면 난 연극을 단 한 편도 본 적 없는 ‘왕초보’였죠. 1년 내내 연극을 보러 다니면서 부단히 노력했어요. 데뷔 작품은 그로부터 4년 뒤, ‘113 수사본부’란 드라마였죠.

본격적으로 연출한 사극 작품으론 ‘암행어사’(1981~1982년)를 꼽을 수 있어요. 이 작품을 통해 사극 연출의 매력을 느꼈습니다. 자칫 딱딱하고 지루해질 수 있는 역사 속 인물을 드라마에 재밌게 녹여내는 작업이 무척 흥미로웠거든요.
‘허준’과 ‘대장금’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에요. 이전까지의 사극은 ‘40대 이상이 보는 드라마’였습니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을 계기로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연령층이 사극 드라마를 보게 됐어요. 당시 ‘허준’의 주인공이었던 탤런트 전광렬 씨가 드라마 촬영을 위해 민속촌에 나타나면 소풍 나온 초등생들이 우르르 몰려오곤 했죠.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에요.

허준은 ‘어린이와 청소년, 젊은이들을 위한 사극을 만들어야겠다’란 생각을 갖고 만든 작품이에요. 당시엔 굉장히 획기적이었죠. 검은색과 흰색 옷만 등장하던 이전 사극과 달리 허준 속 등장인물들의 의상 색은 더없이 화려했어요. 어려운 궁중언어는 알아듣기 쉬운 현대어로, 음악은 당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뉴에이지풍으로 바꿨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이후 제 드라마는 모두 ‘허준’의 제작 방식을 따라 만들어졌어요. 대장금은 전 세계 80여개 국으로 수출되기도 했죠. 한 일본 팬은 내게 ‘대장금을 보고 한국이 아름다운 전통과 문화를 가진 나라인 걸 알게 됐는데, 우리나라가 한때 한국을 침략했었단 사실이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어요. 정말 뿌듯한 순간이었죠.

◆“좋아하는 일? 책 통해 찾아보세요”
어린이들이 책을 많이 읽으면서 자라났으면 좋겠어요. 책 속엔 어린이들이 꿈꾸는 모든 게 담겨 있답니다. 그 속에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으세요. 사람은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면서 살 때 가장 행복하거든요. 가장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은 먹고살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열심히 하다 보면 자연히 ‘성공’도 따라와요.

난 드라마를 만드는 게 무척 즐거워요. 물론 시청률에 대한 스트레스는 말도 못하지만요. 하지만 어느 순간 다시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해요. 하루에 4~5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등 드라마를 연출하는 일은 참 고됩니다. 하지만 한 편의 드라마를 완성하면 그만큼 커다란 보람을 느끼지요.

앞으로도 힘이 닿는 한 계속해서 사극을 만들고 싶어요. 내가 만든 사극을 통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우리 조상의 역사와 문화를 쉽고 재밌게 공부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세계 각국 사람들이 내가 만든 사극을 통해 한국 문화에 흥미를 느끼고 알아나가길 바라요. 내년엔 MBC를 통해 새로운 사극 한 편을 선보일 예정이랍니다. 우리 그때 다시 만나요. 여러분을 위해 열심히 작업할게요!

▲ 인천 동산고교 재학 당시의 이변훈PD / 이병훈 제공

이병훈 PD는
1944년 10월 14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서 태어났다. 1968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과를 졸업, 1970년 당시 한국 문화방송(현 MBC)에 PD 2기생으로 입사했다. 1974년 드라마 ‘113 수사본부’로 데뷔, ‘암행어사’(1981~1982년), ‘조선왕조 500년’(1983~1990년) 등 수많은 드라마를 연출했다. 1996년엔 MBC TV제작국장을 지냈고 이후 ‘허준’(1999~2000년), ‘대장금’(2003~2004년), ‘이산’(2007~2008년) 등 ‘명품 사극’을 잇따라 발표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