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서울 태릉선수촌 내 국제스케이트장. '2013 전국남녀 종별종합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 마지막 날 경기가 한창이었다. 오후 2시 40분쯤 초등 여자 1000m 마지막 조에 속한 한 소녀가 출발선에 서자 주변이 술렁였다. "탕!" 총소리와 함께 소녀는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물 찬 제비처럼 얼음 위를 미끄러져 가더니 불과 1분24초89 만에 결승점을 통과했다. 대회 신기록 탄생 순간이다. 2위 선수와 격차는 무려 5.86초였다.

이날 소녀는 1000m 경기 결과를 포함, 지난 21일부터 계속된 이 대회에서 4관왕(500·1000·1500·3000m)에 오르며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더욱 놀라운 건 4개 종목 모두 대회 신기록을 세웠다는 점. 특히 3000m에선 '빙속 여제' 이상화 선수가 은석초등학교 시절에 세운 기록(4분43초37)을 약 1초 앞당겼다. '제2의 이상화' '2018 평창동계올림픽 유망주'로 불리는 김민지(서울 신현초 6년) 양이 그 주인공이다.

◇잇따른 대회 신기록 '스케이팅 천재 소녀'

민지가 스케이트를 처음 신은 건 일곱 살 때다.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팀 감독을 지낸 아버지 김관규(47세) 씨(현 강원도청 스피드스케이팅팀 감독)의 영향이 컸다. "어릴 적 아빠가 계신 스케이트장에 자주 놀러 갔어요. 선수들이 얼음 위를 씽씽 달리는 모습이 멋져 보이더라고요. 오빠까지 스케이트를 타자 저도 배우게 해달라고 부모님을 졸랐어요."

민지는 스케이팅의 속도감에 흥미를 느꼈다고 했다. "발을 앞으로 조금만 뻗어도 쭉 미끄러지는 게 너무 재밌었어요. 땅에서 달리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다는 점이 짜릿하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스케이팅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됐어요."

처음엔 취미 삼아 시작했지만 2학년 때부턴 선수로 활약할 정도로 기량을 뽐냈다. 주종목은 500·1000m. 전국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건 4학년 때부터다. 민지는 당시 6학년 언니들을 제치고 전국동계체육대회에서 500m 1위에 오르며 '초등 여자 스피드스케이팅계 샛별'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나가는 대회마다 독보적인 기록으로 메달을 휩쓸었다.

현재 민지를 지도하고 있는 황철(49세) 코치는 "최근 민지가 세운 기록들은 중·고등학생 선수를 다 합쳐도 1·2등 수준이다. 무엇보다 순발력이 뛰어나고 승부근성이 강한 게 장점이다. 매일 7~8시간 이어지는 고된 훈련에도 꾀를 부리는 법이 없다. 또래 친구들과 달리 미련할 정도로 열심히 한다"고 칭찬했다.

◇"평창은 제 꿈의 무대가 될 거예요!"

하지만 슬럼프로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4학년 무렵 아무리 연습해도 기록이 안 나왔을 때다. 스케이팅을 포기하고 싶단 충동이 들었지만, 민지는 다시 한 번 이를 악물었다.

"아빠처럼, 아빠가 가르치는 국가대표 선수들처럼 잘 타고 싶다는 제 오랜 꿈을 떠올리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어요. 잘못된 자세를 고치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죠. '엉덩이를 내리고 스케이팅을 해야 한다'는 아빠의 조언도 큰 도움이 됐어요. 요새는 어떻냐고요? 가끔 고된 훈련에 지칠 때도 있지만, 신기하게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즈음엔 항상 시즌이 끝나버리더라고요.(웃음)"

민지 아버지 김관규 감독은 "한번은 힘들면 스케이팅을 그만둬도 괜찮다고 말했더니 그때 이후로 다시는 힘들다는 소리를 안 한다. 스케이트를 무작정 좋아하는 딸의 마음이 같은 길을 걷는 아빠 입장에서 대견하기도, 짠하기도 하다"고 했다.

민지는 지난해부터 쇼트트랙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스피드스케이팅 훈련의 일부로 쇼트트랙을 연습했던 걸 발판 삼아 대회 출전에 나선 것. 놀랍게도 민지는 지난해 각종 전국 쇼트트랙 대회에서 초등 여자 500·1000m 부문 메달권에 진입했다. 스피드스케이팅과 쇼트트랙을 넘나드는 '스케이팅 천재 소녀'로 발돋움 한 셈이다.

민지는 "쇼트트랙용 스케이트는 날이 무겁기 때문에 쇼트트랙을 연습한 뒤 스피드스케이팅을 하면 발이 가벼워져서 훨씬 좋은 기록이 나온다. 눈치 싸움이 치열한 쇼트트랙도 매력적이지만, 기록을 두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스피드스케이팅이 나에게 훨씬 더 잘 맞는다"고 귀띔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둔 민지는 가장 닮고 싶은 선수로 최근 세계 신기록을 잇달아 경신하며 맹활약하고 있는 이상화 선수를 꼽았다. "언니는 제 우상이에요. 태릉 스케이트장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쑥스러워 말을 못 걸었답니다. 다음번에 만나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 탈 수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에요. 저도 언니처럼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게 꿈이랍니다. 그 무대가 꼭 평창이었으면 좋겠어요.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멋지게 활약할 제 모습, 꼭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