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활하다, 털털하다, 당차다, 말을 잘한다, 웃는 모습이 예쁘다, 해바라기를 닮았다. 빙판 위에서 내려온 '쇼트트랙 여왕' 박승희(22세·화성시청)는 그랬다. 지난 2일 오후 경기 화성 자택에서 만난 그는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패션 화보도 찍고,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시구도 하고, 방송 출연도 하고…. 요즘 찾아주시는 분이 많아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틈틈이 이렇게 쉬기도 하고요. 집에 있을 땐 주로 TV를 보거나 자요.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이요? '슈퍼맨이 돌아왔다' '런닝맨'이요. 하하." 

지난 2월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박승희는 울고 웃었다. 여자 쇼트트랙 종목 중 가장 먼저 열린 500m 경기. 당시 선두로 달리던 그는 뒤에서 자리싸움을 벌이던 엘리스 크리스티(영국)와 아리아나 폰타나(이탈리아)가 엉켜 넘어지면서 그 영향으로 함께 넘어졌다. 그 사이 맨 뒤에 처져 있던 리젠러우(중국)가 선두로 치고 올라섰다. 박승희는 일어나 달리려다 또 넘어졌지만, 다시 한 번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끝까지 완주했다. 그의 목엔 값진 동메달이 걸렸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그동안 고생했던 게 떠올라서요. 그런데 곧 괜찮아졌어요. 한국 선수론 최초로 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500m 파이널A에 출전해 메달을 딴 것 자체가 뿌듯한 일이더라고요."

하지만 이때 입은 오른쪽 무릎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무릎 안쪽 근육이 심하게 찢어졌다. 남은 1000· 1500m, 3000m 계주 경기 출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무려 4년을 준비해온 올림픽 무대에 설 수조차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마음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평소 좀 대범하고 쿨한 성격인데, 그땐 정말 눈앞이 캄캄했어요. 그러다 '아예 못 뛴다' 생각하고 마음을 완전히 비웠죠. 이틀 정도는 스케이트를 아예 안 타고 치료에만 집중했어요."

결국 1500m는 포기했고, 3000m 계주 참가는 막판까지 고민했다. 완벽하게 낫지 않은 상태에서 스케이트를 타다 팀원들에게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박승희에게 동료들과 코치진이 용기를 북돋아줬다. "무릎을 못 굽혀서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붕대를 감고 얼음판에 섰죠. 신기하게도 시합이 시작되면 아픈 줄 몰랐어요. 끝나고 나서야 통증이 밀려왔죠."

부상 투혼이 빛을 발했다. 박승희는 3000m 계주와 1000m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2관왕에 올랐다. "팀워크가 워낙 좋았어요. 연습을 많이 했거든요. 남자 선수들과 5000·1만m를 함께 타곤 했어요. 키는 물론, 몸무게도 비슷해서 밀 때 무게중심이 잘 맞기도 했고요. 1000m 금메달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기쁨도 두 배였죠."

소치올림픽 후에도 그는 쉼 없이 달렸다. 2월 동계체전부터 지난달 캐나다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선수권대회까지. 체력적 부담이 큰 와중에 두 대회 모두 500m 시상대 꼭대기 위에 섰다. 특히 세계선수권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이 종목 금메달을 딴 건 이번이 처음이다. 소치에서의 한(恨)을 푼 셈이다. 그는 "올림픽이랑 세계선수권 결과가 바뀌었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박승희는 '빙상 국가대표 삼남매' 둘째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언니 박승주(24세·단국대)는 스피드스케이팅, 남동생 박세영(21세·단국대)은 쇼트트랙 국가대표로 선발돼 함께 소치로 향했다.

"어머니 권유로 초등학교 2학년 때 언니와 학교 특별활동 빙상부에 들어갔어요. 동생이 2년 뒤 합류했죠. 처음엔 스피드스케이팅과 쇼트트랙을 같이 했는데요. 쇼트트랙이 훨씬 짜릿하고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6학년이 시작될 무렵 쇼트트랙으로 진로를 결정했죠."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후 나가는 대회마다 메달을 휩쓴 그는 2007년 만 15세의 나이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선 1000m와 1500m 동메달을 차지했다. 하지만 밴쿠버 대회 이후 슬럼프가 찾아왔다.

"어릴 때부터 밴쿠버에서 금메달을 따는 게 꿈이었어요. 고된 훈련에 지치고 힘들 때마다 그 목표를 생각하면서 힘을 냈는데…. 허무했어요. 하지만 '이왕 시작한 거 올림픽 금메달을 꼭 따보자', 스스로 다짐했죠."

마침내 꿈을 이룬 박승희. 그동안 진행된 수많은 인터뷰에서 "스케이트와 상관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앞으로 의류업계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와 관련해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평창 가야죠. 아직 올림픽에서 500m 금메달은 못 땄잖아요?(웃음) 동생이 이번 올림픽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 함께 평창올림픽에서 멋지게 활약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