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다.
한말을 쓰는 사람끼리는 그 뜻이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줌으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되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이는 나라다.
그러므로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
―주시경 선생이 남긴 말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에 '한글(크고 바른 글)'이란 예쁜 이름을 붙여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일제강점기 국어학자 주시경(1876~ 1914) 선생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의 아버지'라면, 주시경 선생은 언문(천한 말)·암글(아녀자들의 글)로 불리며 천대받던 우리글을 체계적으로 다듬고 바로 세운 '한글의 어머니'라 할 수 있지요.

선생은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천산리 무릉골에서 시골 선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어요. 어릴 적 이름은 '상호'였어요. 어머니와 누나가 캐온 산나물과 도라지로 죽을 쒀 먹으며 지낼 정도로 무척 가난했다고 해요. 열두 살 되던 해 선생은 서울 살던 작은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됐어요. 양아버지의 후원으로 서당에서 열심히 한학을 배우던 어느 날이었어요. 훈장님이 한자 음을 쭉 읽어주면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있던 아이들이, 우리말로 풀이를 해주면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우리말로 하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데 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읽고, 그다음에 우리말로 풀이하는 걸까? 우리 글이 있는데 왜 이렇게 어려운 한문만 배워야 하는 걸까?' 한문을 배우면서 선생은 오히려 우리말과 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어요.

선생은 1893년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공부하며 본격적으로 한글 연구를 시작했어요. 또 배재학당 강사였던 서재필을 도와 '독립신문' 창간에 힘을 보탰어요. 독립신문은 국민 누구나 쉽게 신문을 읽을 수 있도록 '한글 전용'으로 발행됐어요. 신문을 만들면서 선생은 제각각이던 한글 표기법을 통일해나가는 작업을 했어요. 한글 연구와 보급에 매진하는 한편, 민족운동단체인 '독립협회'의 중앙위원을 맡아 외세 침략에 반대하고 정부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는 활동을 이끌기도 했답니다.

1898년 선생은 그간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 문법책 '국어문법'을 완성했어요. 그러나 그사이 조국의 운명은 점점 망국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어요. 일제는 우리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식민지화 정책을 감행했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을 체결해 한국을 반식민지 상태로 만들었어요.

선생은 1907년 상동 청년학원에 '국어강습소'를 설립해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쳤어요. 서울 시내 스무 개가 넘는 학교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국어 강의는 물론 국사 강의도 했어요. '앉을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을 만큼' 바빴다고 해요. 강의할 책을 큰 보자기에 싸서 이 학교 저 학교 다니는 모습 때문에 '주보따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어요.

1910년 8월 우리나라는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가 됐어요. 일제는 식민지 지배를 굳히기 위해 '민족말살정책'을 폈는데, 그 표적이 된 게 바로 '국어'와 '국사'였어요. 학교에서는 국사와 국어를 없애고 일본 역사와 일본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나라를 잃었는데 언어까지 잃게 되면 영원히 독립을 쟁취할 수 없을지도 몰라. 국어를 더 열심히 가르쳐야 해.' 선생은 1911년 보성중학교에 '조선어강습원'을 열어 제자들을 양성했어요. 교단에 설 때는 용사가 전쟁터에 선 것 같은 태도로 참되게, 열정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학생들을 응시하며 강의를 했다고 해요.

몸을 돌보지 않은 한글 연구와 강의 때문이었을까요. 선생은 1914년 5월 27일 서른아홉 한창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학생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우리말과 글,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의 정체성과 자주독립의 정신을 일깨우던 '주보따리' 주시경 선생. 그는 일제강점기 '한글'로 우리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 위대한 독립운동가였어요.

사진·자료 제공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