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의 계절'이다. 모 심는 기계인 이앙기 소리가 겨우내 잠들었던 논을 깨우고 있다. 순천만 논에서도 요즘 모내기가 한창이다. 광활한 대지가 초록 옷으로 갈아입는 중이다. 여기에 조금 특별한 풍경이 더해졌다. 기계음이 아닌 "영차" 소리와 함께 손 모내기가 진행된 것. 게다가 '꼬마 농부'들 솜씨다. 가을에 수확할 벼의 쓰임새도 독특하다. 겨울에 이곳을 찾는 흑두루미에게 먹이로 줄 생각이란다. 일명 '흑두루미 논 가꾸기 프로젝트'다. 전남 순천 인안초등학교가 올해로 4년째 펼치고 있는 '생태감수성 UP' 프로그램이다.

◇특명! '흑두루미를 보호하라!'

지난 27일 오전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옆 논. 입구부터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찰랑찰랑 물에 잠긴 드넓은 논에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담겨 일렁였다. 그 모습에 취해 있을 찰나,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니 논 한가운데 일렬로 선 어린이들이 보였다. 이들은 온몸에 진흙 범벅을 한 채 고사리손으로 모 심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줄 간격에 맞춰 착착 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농수로 주위도 시끌벅적했다. 앞서 모내기를 마친 학생들이 몸에 묻은 흙을 씻어내며 물장난을 쳤다. 그늘 아래 돗자리를 깔고 점심 먹는 어린이들도 눈에 들어왔다. 이 중 박상은(순천 인안초 3학년) 양이 외쳤다. "밥이 왜 이렇게 맛있지?" 인안초 '흑두루미 논 가꾸기 프로젝트' 5월 활동, 모내기 현장이다.

▲ 모내기에 온몸이 흙범벅 된 어린이들. /모내기 후 논에 사는 생물도 관찰했다. /순천=오장환 기자, 인안초 제공

인안초가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한 건 지난 2012년이다. 2011년 전교생 수 23명으로 폐교 위기에 놓였다가 간신히 유보 판정을 받은 뒤, 교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학교 살리기에 나서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순천만 논에서 흑두루미를 위한 농사를 짓고, 순천만 생태 탐사에 나서는 게 주된 내용. 람사르습지이자 '생태계 보고'로 일컬어지는 순천만에서 약 3㎞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십분 활용했다.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닌, 연간 50여 시간짜리 진짜배기 생태 교육이다.

논농사의 경우 '친환경 농법'을 적용한 게 특징이다. 새 먹이가 될 벼인 만큼,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우렁을 놓아 병충해를 방지한다. 여기에 월별로 △논 주변 식물 활용해 화전 만들어 먹기 △허수아비 만들어 세우기 △벼에게 노래와 연주 들려주기 △벼 껍질 벗겨 밥 해먹기 △지푸라기로 물건 만들기 △겨울 철새 먹이 주기 △철새 탐조 등 흥미진진한 활동이 곁들여진다. 체험 내용은 '논 공책'에 기록한다.

이 모든 건 학생회 자치활동부서 '논 위원회'가 앞장서서 진두지휘한다. 위원장 탁유정(6학년) 양은 "이번 모내기를 앞두고 모내기 방법이 담긴 포스터를 제작해 각 교실과 복도에 붙였다. 학년별로 설명회를 열고, 빨간 대야에 모 심는 연습도 했다. 작년만 해도 서툴렀던 2학년 동생들이 나름 선배라고 올해 1학년 신입생들에게 모내기를 가르쳐주는 모습을 보니 재밌다"고 말했다.

◇순천만에서 자라는 '초록 꿈'

'흑두루미 논 가꾸기 프로젝트'가 가져다준 선물은 푸짐하다. 우선 전교생 수가 5배 가까이 늘어 현재 113명에 달한다. 전학 문의도 잇따르고 있다. 이보다 중요한 건 학생들의 변화다.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방법에 대해 생각할 줄 알게 됐다. 주변 식물 하나 그냥 지나치지 않고 관찰하는 습관도 생겼다. 협동심과 리더십을 기른 건 덤이다.

담당 교사 박향순씨는 "아이들의 생태 감수성이 부쩍 자랐다. '순천만 지킴이'가 다 됐다"며 웃었다. 임종윤 교장은 "실제 순천만을 찾는 흑두루미가 늘었다. 학생들이 '그린 마인드'를 가진 어른으로 자라나는 데 이 프로그램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인안초 어린이들의 목소리는 밝았다. "공부만 하면 마음이 답답해지는데, 이렇게 밖에 나와 자연을 느끼고 체험하면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에요. 참, 지난겨울에 흑두루미가 학교에 날아와 연못가를 빙빙 돌다 갔어요. 왠지 뿌듯하더라고요. 흑두루미 타고 시베리아 가는 상상도 해보곤 해요."(이희선 양) "올봄 순천만에서 본 너구리 발자국이 눈에 선해요. 그 친구들은 잘 지내고 있겠죠? 빨리 커서 형들처럼 가을에 벼 베기에 참여하고 싶어요. 작년엔 나르고 훑는 일만 했거든요."(오승위 군·이상 3학년)

돌아오는 길, 머릿속에 순천만의 가을이 그려졌다. 황금빛 벌판에서 밀짚모자 눌러 쓰고 낫을 든 '꼬마 농부'들이 수확한 벼를 들고 기뻐하는 장면이다. 이들 덕분에 올겨울 흑두루미들도 행복할 테다. 유정이의 말도 마음에 남는다. "할아버지·할머니처럼 농부가 되고 싶어요. 제가 잘할 수 있는 일 같아요." 순천만에서 자라나고 있는 초록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