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 홍씨 성을 가진 재상이 있었어. 공이 벼슬을 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야. 하루는 길을 가다가 비를 만났어. 비를 피하려고 작은 굴 속으로 후다닥 뛰어들어 갔지. 동굴 속에는 집이 있었고, 열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얼굴이 고운 여승이 혼자 단정히 앉아 있었어.

공이 여승에게 물었어.

"어찌 홀로 계시오?"

여승은 공손히 대답했지.

"이곳에서 비구니 스님 둘과 같이 지내는데, 둘은 먹을거리를 구하러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여승과 이야기를 나누던 공은 여승에게 반해 덜컥 미래를 약속했어.

"몇 년 몇 월 며칠에 그대를 데리러 오겠소."

여승은 이 말을 철석같이 믿고 약속한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지. 하지만 약속한 날이 지나도 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거야. 여승은 공을 기다리다 마음에 병이 들어 그만 죽고 말았어.

나중에 공이 남쪽 지방을 책임지고 수비하는 절도사가 되어 진영에 있을 때의 일이야. 하루는 도마뱀처럼 생긴 조그만 벌레가 공의 이불 위로 기어다니는 거야. 공은 아전에게 밖으로 던져버리라고 명령했지. 그러자 아전이 그것을 죽여 버렸어. 그다음 날에는 조그만 뱀이 방에 들어왔는데, 아전이 그 뱀을 또 죽여 버렸어.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다음 날에도 또다시 뱀이 방으로 들어오는 거야. 공은 그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혹시 전에 만난 여승이 이렇게 나타난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공은 자신이 누군데 그깟 뱀 따위에 겁을 먹겠느냐고 생각했어. 그리고 아주 없애 버릴 작정으로 아전에게 뱀을 보면 즉시 죽이라고 명령했어.

그런데 그 뒤로도 날마다 뱀이 나왔어. 게다가 날마다 몸뚱이가 점점 커지는 거야. 그러다 마침내 큰 구렁이가 되었어.

공은 군졸들을 모두 모아 놓고 칼을 들고 자기 방을 둘러싸 지키게 했어. 그런데도 여전히 구렁이는 포위를 뚫고 들어왔어. 군졸들이 너도나도 구렁이를 죽이느라 애를 썼지. 또 사방에 장작불도 피워 놓고 구렁이가 보이기만 하면 불 속에 집어던졌어. 그런데도 구렁이는 끊임없이 나타나는 거야.

이젠 어쩔 수가 없었지. 공은 밤에는 구렁이를 쇠코잠방이에 넣어 방 안에 두고, 낮에는 궤짝에 넣어 두었어. 그리고 변방을 순찰하러 갈 때는 다른 사람한테 궤짝을 짊어지고 앞장서서 가게 했어.

그런데 그 후로 공은 점점 더 정신이 쇠약해지고 얼굴빛도 초췌해지더니, 마침내 병에 걸려 죽고 말았대.

> > 생각해봅시다

조선 초기 성현(1439~1504)이 지은 ‘용재총화(?齋叢話)’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연인의 약속을 기다리다 죽은 여승은 구렁이가 되어 나타나 자신의 한을 풀려고 합니다. 공은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구렁이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지요. 약속을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겠지요? 책임을 피하려 하면 할수록 치러야 할 대가는 점점 더 커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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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회 | 소년조선일보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