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경매'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우리나라 미술품 경매시장 규모는 지난해 거래 금액 기준 1680억원에 달한다. 미술품 경매 시스템이 처음 도입된 1998년(3억원)과 비교했을 때 무려 560배나 커진 셈. 거래 작품 수도 87점에서 1만2863점으로 148배 증가했다. 참여 연령대도 20~30대까지 낮아졌으며, 구경 삼아 가족과 함께 경매장을 찾는 어린이도 늘고 있다.

이 같은 상황 속에 지난 22일, 국내 주요 미술품 경매 업체 K옥션이 올해 첫 메이저 경매를 진행했다.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1913~1974)를 포함해 국내외 유명 화가들의 작품과 예술적·역사적 가치가 큰 고미술품이 대거 출품돼 화제를 모았다.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 작품 10억에 팔리다

봄을 알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이날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K옥션 본사 경매장. 춥고 궂은 날씨에도 오후 5시 경매를 앞두고 30분 전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이곳에 마련된 120석가량이 다 찼다.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은 뒤에 선 채로 경매 시작을 기다렸다.

▲ 참가자는 작품이 마음에 들 경우 사겠다는 의미로 고유번호가 적힌 푯말(패들)을 든다.

"땅!" 오후 5시 정각이 되자 앞쪽 단상에 올라간 경매사가 왼손에 든 경매용 망치(해머)를 내리쳤다. 도록과 네모난 모양의 번호 표(패들)를 손에 쥔 참가자들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번 경매에 출품된 164점 중 가장 큰 관심이 쏠린 건 김환기의 작품 '19-V-69 #57'이었다. 지난해 그의 작품 '12-V-70 #172'가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약 63억3000만원)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경매사도 긴장했는지 목소리를 가다듬고 외쳤다.

"랏(lot·경매 작품 번호) 29번. 이번 작품은 9억6000만원에서 시작해 2000만원씩 올라갑니다."

'19-V-69 #57'은 시작 금액부터 남달랐다. 점·선·면이 한 화면에 담긴 이 그림은 김환기가 1969년 미국 뉴욕에 머물던 시절 그린 추상화로, 동양적인 감수성을 녹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9억6000, 9억8000, 10억원. 서면 10억입니다. 10억2000. 10억2000만원 전화 최고가. 10억4000만원 계십니까? (정적) 안 계시면 마무리합니다. 땅! 276번 전화 손님께 10억2000만원에 낙찰됐습니다."

단 40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10억2000만원은 이날 경매 최고 낙찰가. 이후 뜨거운 열기가 이어져 한국을 대표하는 다른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도 수집가들의 선택을 받았다.

◇미술품 경매시장, 미술 정보 얻는 통로

잠깐의 휴식 뒤 계속된 후반부 경매에서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화재급 고미술품들이 등장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 '유가사지론 권 66' 경매가 치열했다 10여 차례의 접전 끝에 1억6500만원을 제시한 새 주인 품에 안기자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밖에 단원 김홍도(1745~?)가 금강산의 절경을 화폭에 담은 '금강사군첩'은 1억5000만원에,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는 최저 추정가의 두 배인 5000만원에 낙찰돼 현장을 놀라게 했다. 3시간에 걸쳐 막을 내린 이번 경매의 낙찰률은 82.3%, 낙찰 총액은 72억원이다.

현장에는 미술 갤러리 운영자와 수집가, 재미 삼아 구경 온 회사원부터 가족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발걸음 했다. 경매장에서 평소 눈여겨봤거나 새롭게 떠오르는 미술품 등을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미술품의 가치와 시장 흐름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윤형근(1928~2007) 작가의 단색화 '무제'를 손에 넣은 박달출(65)씨는 "경매장은 좋은 작품을 발굴하고 시장의 판도를 읽는 최고의 창구"라며 "단색화는 미술 시장에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어 구입했다"고 말했다. 관람객 중에서는 키 작은 꼬마 소녀가 눈에 띄었다. 화가가 꿈이라는 윤재인(경기 안성초 2) 양은 "그림 보는 눈을 키울 수 있다는 말에 아빠와 경매장을 찾았다"면서 "경매하는 모습이 신기한데 조금 정신없다"며 웃었다.

미술품 경매와 방청은 나이 제한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경매는 사전에 미리 가격을 적어 내는 서면 응찰과 당일 실시간 전화, 현장 방문 등 세 가지 방법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 현장 참가자들의 경우 경매사가 희망 가격을 불렀을 때 패들을 들면 된다. 방청은 현장에서 무료로 참여 가능하다.

손이천 K옥션 경매사 겸 홍보실장은 "미술품 경매는 투명한 가격과 정보 공개를 통해 시장의 선진화를 이끌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꼭 응찰하지 않더라도 가족과 함께 미술품을 구경하러 와도 좋다"며 "어린이들 입장에선 예술적인 감각을 키우고 경제 개념을 익힐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