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복 입으면 '진짜 한국인' 된 것 같아 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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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20 09:39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고려인 4세 어린이 '한국 정착기'

	고려인 4세 어린이들은 서툰 한국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 고려인동포문화복지지원센터에서 진행하는 한국어 수업에 매일 참여한다.
/안산=임영근 기자
고려인 4세 어린이들은 서툰 한국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 고려인동포문화복지지원센터에서 진행하는 한국어 수업에 매일 참여한다. /안산=임영근 기자
올해는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이 되는 해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혹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 연해주로 떠났던 조선 사람들이 1937년 소련 정권에 의해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우크라이나 등지로 강제로 옮겨진 사건이다. '고려인'(러시아와 구소련 국가에 사는 우리 동포)이라는 이름으로 타지에서 어렵게 살아온 이들의 후손이 최근 다시 한국땅을 찾고 있다. 증조 할아버지의 고향인 한국을 '조국' 이라고 부르는 '고려인 4세' 어린이들의 한국 정착기를 취재했다.

◇"한국어 배워서 TV 마음껏 보고 싶어요"

"아나스타샤 왔니? 오늘은 일리아도 같이 왔네."

지난 16일 경기 안산 고려인동포문화복지지원센터에 들어선 두 여학생을 센터 직원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이 센터는 고려인 지원단체다. 150여 명의 고려인 어린이들이 방과 후 이곳에서 한글과 태권도, 악기 등을 배운다.

지난해 9월 부모님과 함께 러시아를 떠나 한국에 온 최아나스타샤(10) 양도 매일 학교 수업이 끝나면 센터로 달려온다. 서툰 한국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 한글과 씨름 중이다. "읽고 쓰는 건 어느 정도 되는데 말하는 건 너무 어려워요. 한국어는 러시아어와 어순이 다르거든요. 말하려고 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아요."

고려인 아이들은 된소리 발음을 특히 어렵게 느꼈다. '깨끗하다' '빨강' '싸움' 등 쌍기역이나 쌍시옷이 들어간 단어는 여러 번 반복해도 발음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지난해 6월 한국으로 건너온 김일리아(11) 양은 "TV를 볼 때 못 알아듣는 게 가장 답답하다"고 했다. "빨리 한국어를 익혀서 마음껏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싶어요(웃음)."

	한국 문화를 배우기 위해 태권도 수업을 받는 고려인 4세 어린이들.
한국 문화를 배우기 위해 태권도 수업을 받는 고려인 4세 어린이들.
◇"태권도복 입으면 '진짜 한국인'된 기분이에요"

아이들은 센터의 지원을 받아 태권도와 K팝 댄스 등 다양한 한국 문화 수업에 참여한다. 이날은 태권도 수업이 있었다. 센터를 찾은 10여 명의 고려인 아이들이 근처 태권도장으로 향했다. 흰 도복으로 갈아입은 뒤 '국기에 대한 경례'부터 했다.

"태권!"

쩌렁쩌렁한 기합소리가 도장에 울려 퍼졌다. 관장의 시범에 따라 아이들은 본격적으로 태권도 품새를 익혀나갔다. 노란띠를 맨 김미하일(12) 군은 "일주일에 세 번씩 태권도 수업을 받는다"면서 "태권도복을 입고 있으면 '진짜 한국인'이 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태권도 못지않게 인기있는 프로그램이 매주 화요일 열리는 'K팝 댄스' 수업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고려인 4세 최예원(11) 양도 요즘 K팝 댄스에 푹 빠져 있다.

"고려인 친구들과 함께 유튜브로 아이돌 가수의 동영상을 보며 춤 동작을 연습해요. 춤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가사를 외우게 되니까 한국어 공부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일리아(왼쪽) 양과 미하일 군이 한국어 교실에서 한글을 배우는 모습.
일리아(왼쪽) 양과 미하일 군이 한국어 교실에서 한글을 배우는 모습.
◇고려인 중·고등학생이 동생들에게 직접 한글 가르쳐

고려인 4세 어린이들이 한국에 잘 적응하려면 '한국어'를 빨리 습득하는 게 가장 시급하다. 김영숙 고려인동포문화복지지원센터 사무국장은 "다른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부모 중 한쪽이 한국인이라 한국어를 접할 기회가 많지만, 고려인 아이들은 부모들도 한국어를 배워야 하는 상황이라 말을 배우는 속도가 훨씬 더디다"고 설명했다.

이에 고려인 중·고등학생들이 어린 동생들을 직접 가르치고 있다. 정착한 지 4~5년 넘은 고려인 청소년 10여 명이 현재 센터에서 '한글 선생님'으로 활동 중이다. 안블라드(17) 군은 "같은 어려움을 겪었기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면서 "학교에서 늦게 마칠 때는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가르치기도 한다"고 말했다.

어린이들도 고려인 언니·오빠들에게 수업받는 걸 좋아한다. 미하일 군은 "율리아 누나가 한글을 쉽게 잘 가르쳐 준다"면서 "선생님보다 더 좋다"며 활짝 웃었다.

김율리아(19) 양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하다"면서 "내년에는 한국을 떠나야 할 수도 있어서 이 시간이 더 소중하다"고 말했다.

고려인 4세들은 재외동포법상 외국인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만19세가 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국내에 계속 체류하기 위해서는 대학교 입학 등의 조건을 갖춰야 한다. 김 사무국장은 "고려인들은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하는 진정한 한국인"이라며 "고려인 아이들이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대접받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