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퇴학 처리됐을 걸로 사료되옵니다만…."

사비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투가 점점 사극스러워져 갔다. 골리샘은 사비가 그러거나 말거나 안으로 다짜고짜 들어갔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학교에서도 공부 안 하는 것들이 야간 자율 학습하러 모인 것도 아닐 터."

골리샘은 우선 냉장고부터 열었다. 먹을 걸 꺼내면서도 자기 집 냉장고를 열듯 당당했다.

"이거밖에 없냐? 꼴랑 이걸 먹고 안 쓰러지냐?"

"아니, 그 냉장고에는… 지구 멸망 시 적어도 한 달은 버틸 식량이 준비된 식량 창고나 마찬가지이온데… 이거밖에라니."

수리는 몇 날 며칠 굶은 사람처럼 먹어대고 있는 골리샘을 한 마리의 공룡 쳐다보듯 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지구 멸망 대비용 식량이 낭비되는 것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차지게 맛있게 먹는지, 입안에 침이 고일 정도였다. 수리 어깨에 있던 프랭크는 참다못해 침을 주르륵 흘렸고 그 침은 수리 얼굴 위로 뚝 떨어졌다. 마루는 아예 정신줄 놓아 버린 채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있었다. 입안에 침이 우물처럼 고여 있었다.

"자, 이번에 어디로 갈 작정이야? 또 꿈이 어쩌고저쩌고 이상한 꿈 얘기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자! 인간적으로."

프랭크는 골리샘의 말에 기겁을 하더니 긴 코를 똘똘 말아버렸다.

"네, 인간적으로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샘, 이곳을 방문하신 이유를 아직 밝히지 않았사옵니다. 혹시 퇴학이 안 퇴학이라도 됐는지요?"

수리의 말투도 사극스러워져 있었다. 골리샘은 한창 먹은 탓에 더 육중해진 몸뚱이를 끙끙 힘들게 일으켰다. 그 중량감 때문에 바닥이 흔들거렸다.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다.

"잘렸다. 왜?"

골리샘의 깜짝 발언에 수리와 사비, 마루는 흡, 숨을 들이마셨다.

"학생들에게 유사… 그 뭣이냐, 유사 폭력과 유사 폭언 그리고 유사 허세를 행사했다는 이유로, 잘렸다."

마루가 꺽꺽 목 놓아 웃었다. 수리와 사비도 킥킥 큭큭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난 억울하다. 내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너무나 쉬운 해고를 당한 것이다. 난 쉬운 해고를 지향하는 오메가 고고학교의 교사채용법에 대항해 분연히 일어설 것을 맹세한다. 내가 너희를 찾아온 이유는 단 하나!"

두 주먹을 불끈 부르르 떨며 결연한 의지를 천명하는 골리샘의 선언이 끝나기도 전에 수리가 슬쩍 농을 던졌다.

"샘~ 그럼 다른 유사 학교를 알아보심이."

"그래서, 나는 중국의 베이징대학의 나의 스승님께 가려고 한다. 스승님이 나에게 맡길 일이 있다고 하셨다."

골리샘과 중국, 골리샘과 베이징, 골리샘과 베이징대학, 골리샘과 스승님….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이 해괴한 조합은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수리는 역시 임기응변의 달인다웠다.

"샘, 글로벌 인맥이시네요. 그럼 행운을 빌게요. 샘의 의지와 그 의지를 동반한 선언을 지지합니다. 헤헤."

수리는 이렇게 말하는 순간 악마의 딜이 뇌리를 스쳤다.

"샘, 저희가 중국 베이징에 가야 하는데, 혹시 동행하실 의향은 있으시온지요? 아무래도 샘의 미모가 중국의 베이징을 돌아다니기에는 상당히 위험이 따르기에, 저희가 모시고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 추론이 듭니다만…."

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골리샘은 수리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수리의 양 볼에 뽀뽀를 쪽쪽 하려 했다.

"호호, 너무 고마워~ 너무 이뻐…. 수리는 나의 팻냥(강아지와 고양이)이야."

수리는 얼굴을 돌렸지만 갑작스런 골리샘의 행동 때문에 속이 거북해졌다. 하지만 아빠의 메시지를 받은 이상, 중국 베이징에 가는 여비를 공짜로 마련할 수 있다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사비는 수리의 볼을 빼앗으려 한 골리샘에게 화가 나서 골리샘의 다리를 교묘하게 걸어 넘어트렸다. 골리샘은 온몸을 비비적비비적 힘들게 겨우 일어났다. 앞으로 넘어졌는데 코는 깨지지 않았다.

"그래, 너희는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거니? 혹시 북경원인이라고 말하면…. 난 너희를 때릴지도 몰라!"

골리샘은 이런 과격한 말도 웃으면서 얘기할 줄 아는 매우 교양 있는 샘이었다.

"핑(平)을 만나러 갑니다. 핑요."

갑자기 골리샘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핑?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핑, 핑, 핑퐁? 퐁핑? 왜 이렇게 익숙하지?"

"샘의 스승님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사비가 방금 전의 다리 걸림은 모르는 척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물었다.

"왕애지(王愛志) 교수야. 베이징대학 고고학과 교수님이시지. 고인류학의 세계적 권위자셔."

골리샘의 얼굴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가득 차 있었다.

"고인류학? 오호~ 샘, 그럼 우리의 딜은 성사된 겁니다. 오케이?"

수리는 고인류학이라는 말에 쾌재를 불렀다. 골리샘은 벌써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수리가 마루를 향해 싱긋 웃으며 윙크를 날렸다.

"지구를 벗어나면 시간은 앞으로도 흐르고 뒤로도 흘러. 그리고 시간은 그렇게 빙빙 돌아서 결국 하나의 원점, 아지트 오리온으로 돌아온다."

마루가 신나서 외쳤다.

"너희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니? 중국의 베이징 가는 건데 지구를 벗어나면 어쩌고? 베이징이 외계행성이냐? 난 안 가."

골리샘은 다시 짐을 풀기 시작했다. 수리가 골리샘에게 아양을 떨었다.

"그게 아니옵고, 이건 피스솔저들의 구호?라고나 할까? 뭐 그런…. 헤헤."

수리는 골리샘의 짐을 다시 챙겨 들었다. 사비는 백팩에 손도끼, 손망치, 손도끼 등을 챙겨 넣었다. 석기시대스럽긴 하지만 꽤 요긴한 무기들이었다.

베이징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수리는 난감했다. 그 넓은 중국 땅 아니 그 넓은 베이징에서 핑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찾을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샘, 베이징대학의 왕애지 교수님은 언제 만나러 가실 거예요?"

수리는 골리샘 스승님의 신세를 질 생각이었다.

"메일이 올 거야. 개인 번호는 몰라."

골리샘의 불확실성의 대답에 아이들은 아연실색했다. 핑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한 가운데, 드디어 게이트가 열렸다. 수리는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환영 인파들 가운데 LED 전광판이 번쩍번쩍, 핑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Ping이라고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