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들의 비상연락처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비상연락처는 '현재'에 있고 수리와 아이들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있다는 것이다.

수리는 책 골든릴리를 펼쳤다. 책 어딘가에 느닷없이 단서가 나타날지 모를 일이었다.

"무선통신기가 어디 있을 텐데…."

수리는 책을 뒤적거리며 중얼거렸다.

"사비야, '바이킹의 나침반'을 써봐."

사비가 일깨워주었다.

수리는 부랴부랴 배낭에서 안경 모양을 한 바이킹의 나침반을 꺼냈다.

"흠…. 이건 사라진 베이징맨에 관한 단서가 들어 있는 건데. 헌터들과 무슨 관련이 있겠어?"

수리는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아. 너희는 내가 너희 아빠들과 서로 아는 사이라고 짐작도 못 했잖아? 하지만 난 너희 아빠들과 만난 적이 있었지. 그러니까 헌터들과 아빠들이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함부로 단정 짓기 어려운 것 같은데?"

핑이었다.

수리는 핑의 말에 동의했다. 수리는 그제야 바이킹의 나침반을 얼굴에 썼다.

그런데 책 골든릴리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지난번에 본 적 없는 새로운 암호들이 재배열되면서 빠르게 지나갔다.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려웠다.

"이건 매트릭스야. 매트릭스."

수리는 지난번에 기껏 종이 아래에 감춰진 다른 암호를 보여주는 팰림프세스트에 불과했던 책 골든릴리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풍경이 지나갔다. 수많은 과거가 지나갔다. 수많은 역사가 지나갔다. 그리고….

수리가 몽유병 환자처럼 조금씩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리가 발을 디디는 곳이 금세 다른 세상으로 바뀌었다.

"수리야, 이거 뭐야? 실화야?" 모두 한마디씩 하며 수리 뒤를 따라갔다.

수리와 아이들은 수메르시대에 쐐기문자를 써 넣던 장사꾼들 곁을 지나갔고, 이집트시대 피라미드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인부들 곁을 지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중국 땅에 다다랐다. 수많은 책이 구덩이 속에서 활활 불태워지고 있었다.

"앗, 저거야!"

수리가 소리 질렀다.

책 골든릴리였다. 물론 골든릴리라고 쓰여 있지는 않았지만, 표지에 골든릴리, 황금백합이 그려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불구덩이 속에서 책 골든릴리를 후다닥 낚아채더니 그대로 도망가는 자가 있었다. 수리는 도망가는 도둑의 뒷모습만 봤다. 도둑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수리는 계속 걸었다. 이번에는 현재 시점의 베이징 시내였다. 계속 걸어가니 협화의학원이 나타났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푸른색 기와가 청량하게 아름다웠다. 수리는 B동 건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연구실 앞에 멈추어 섰다.

"왕애지 교수님 연구실이잖아?"

골리샘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 질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수리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마침 왕애지 교수가 금고 문을 닫고 잠그고 있었다. 왕애지 교수는 비밀번호를 사용했다. 그리고 연구실을 나갔다.

수리는 방금 본 비밀번호로 자물쇠를 땄다. 금고 문을 열었다. 금고 안에 헌터들이 사용하는 무선통신 기기가 있었다. 비상연락처였다. 도대체 왕애지 교수는 왜 이걸 갖고 있는 걸까? 왜 금고에 보관하는 것일까?

수리는 무선통신기를 꺼냈다. 표면에 'hunter'라는 선명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빨리 여기서 나가자."

핑이 수리와 아이들을 재촉했다.

순간 연구실이 덜컹 흔들렸다. 수리도 아이들도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이거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역봉이 소리쳤다. 골리샘은 이미 넘어진 상태였다. 연구실은 계속 흔들렸다. 그러더니 어디선가 흙더미가 쏟아져 내렸다. 모두 당황한 채 서로만 응시했다.

"우리가 지하 감옥에 있었잖아? 지하 감옥이 흔들리는 거라고. 탈출해야 해."

핑이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그제야 아이들은 탈출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로 탈출한단 말인가? 왕애지 교수 연구실도 현실은 아니었다. 지하 감옥에서 체험하는 가상현실이었다.

"맞다. 생각났어!"

수리는 크게 외치면서 왕애지 교수 연구실의 한쪽 벽면에 설치된 책장을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둥근 맨홀 뚜껑이 나타났다. 역봉이 나서더니 무거운 맨홀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모두 아래로 내려갔다.

베이징 시내 하수도관이 있는 곳이었다. 여전히 수많은 쥐가 들끓고 있었다.

"이건 뭐야? 쥐들의 역습이야 뭐야? 쥐들은 전혀 쓸모가 없는 설치류라고. 어떤 동물에게도 도움이 안 될뿐더러 사람에게는 해만 끼치니. 이 쥐들을 어디 써먹을 데가 없을까?"

"멍청아! 이 상황에서 쥐가 무슨 소용이야."

사비가 마루의 뒤통수를 퍽 때렸다.

"무슨 소리! 이 쥐들도 알고 보면 우리 인류의 조상이란다. 공룡 시대를 종식한 소행성 충돌로 인해 작은 설치류들이 땅속으로 파고들며 살아남았어. 우리의 조상인 거라고. 존경하고 존중해야지."

마루는 정색하고 야단을 쳤다.

핑이 낄낄 웃었다.

"쥐를 존경하고 존중하래. 웃긴다 마루."

핑은 웃음을 멈출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