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고 떨어진 어릴적 추억… 보송보송하게 고쳐드립니다
오누리 기자 nuri92@chosun.com 입력 : 2018.01.22 09:40

[현장] 인형 병원에 가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역삼동에 있는 '인형 병원'에 손님이 찾아왔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 여중생의 품에는 담요로 감싼 강아지 인형이 안겨 있었다. 함께 온 학생의 아버지는 "아이가 십년 전부터 곁에 두고 지낸 애착 인형"이라며 "치료비가 많이 들어도 괜찮으니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인형 수술 경력 30년의 이수민(54)씨가 조심스레 인형을 받아 상태를 체크했다. 누렇게 변한 털은 군데군데 빠져 있었고, 옆구리는 살짝 찢어져 있었다. 코에는 긁힌 상처가 많았다. 이씨는 "빠진 털을 새로운 천으로 덮어주는 피부이식과 지저분한 코를 매끈하게 만드는 코 수술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찢어진 옆구리는 간단한 봉합수술로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가장 먼저 오래 묵은 솜을 빼고 새 솜을 채워 넣는다. 코에는 새로운 천을 덧대 반질반질하게 한 다음 원래 있던 자리에 꿰매 넣는다. 마지막으로 뜯어진 봉제선을 꿰매면 수술 완료./조현호 객원기자
가장 먼저 오래 묵은 솜을 빼고 새 솜을 채워 넣는다. 코에는 새로운 천을 덧대 반질반질하게 한 다음 원래 있던 자리에 꿰매 넣는다. 마지막으로 뜯어진 봉제선을 꿰매면 수술 완료./조현호 객원기자
수술이 시작됐다. 인형을 수술 테이블에 눕힌 뒤 옆구리 봉제선에 칼을 갖다 댔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솜이 몸통에서 쏟아져 나왔다. 깨끗한 솜을 인형에 가득 채워 넣고 노련한 바느질 솜씨로 단숨에 봉합까지 마쳤다. 털이 빠진 곳은 원래 털 색과 가장 비슷한 천을 골라 덧댔다. 상처투성이였던 코에도 비슷한 재질의 까만 천을 덧씌워 꿰맸다.

한 시간 남짓 이뤄진 수술 끝에 강아지 인형은 원래의 모습을 거의 되찾았다. 인형을 받아든 소녀는 폴짝폴짝 뛰며 기뻐했다. "낡고 더러워진 '생이(강아지 인형)'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는데, 앞으로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피부과·안과·성형외과… 인형 상태에 따라 맞춤 수술

오래돼 헤지고 찢어진 봉제 인형만을 전문으로 수선하는 '인형 병원'이 성업 중이다. 의뢰인들의 연령대도 다양하다. 예닐곱살 유치원생부터 50대 중년층까지 각자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을 품고 인형 병원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 병원에서도 입원 수속을 마친 수십개의 인형이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 귀가 뜯어진 토끼인형, 눈알이 없는 강아지 인형, 몸 한쪽이 까맣게 타버린 개구리 인형 등 길에 내놔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 것처럼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인형마다 증상도 다양하다. 솜을 갈거나 찢어진 부분을 꿰매는 간단한 수술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대수술'이 필요한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병원에는 각기 다른 분야의 전공의 다섯 명이 대기 중이다. 오래된 털을 새것처럼 만들어주는 '피부과' 의사, 떨어진 팔·다리 등을 만들어 붙이는 '정형외과' 의사, 안면 윤곽 등을 담당하는 '성형외과' 의사, 뜯어진 눈알만 전문으로 수선하는 '안과' 의사 등이다.

복제 인형을 만들어내는 '복제 전문' 의사도 있다. 이 병원을 운영하는 김갑연(57·토이 테일즈 대표)씨는 "어릴 적 갖고 놀던 인형의 사진 한 장만 들고 와서 똑같은 걸 만들어 달라고 하는 분도 있다"면서 "생명윤리법 때문에 복제인간을 만들 수 없지만 '복제 인형'은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다"며 웃었다.

	인형 병원 의사들이 인형을 치료하고 있는 모습.
인형 병원 의사들이 인형을 치료하고 있는 모습.
"추억 담긴 인형… 사람 치료하듯 소중히 다뤄요"

"Amazing!(놀라워라!)"

이날 인형 병원을 찾은 영국인 에마 에번스(33)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결혼 후 한국에 정착했다는 에번스씨는 지난주 입원시킨 토끼 인형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품에 꼭 안았다.

"어린 시절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묵묵히 내 곁을 지켜준 고마운 친구예요. 네살 때부터 저와 함께 한 인형이죠. 인형의 원래 모습과 체취를 간직하고 싶어서 최소한으로 수술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딱 원하는 대로 됐어요. 정말 행복해요."

이곳 인형 병원을 찾는 사람은 매달 100명 안팎이다. 김 대표는 "병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인형은 물건이 아니라 '가족'이다. 사람을 치료한다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인형을 수선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년조선일보를 읽는 어린이들에게 소중한 인형과 오래 함께할 수 있는 '팁'을 알려 드릴게요. 인형을 씻긴다고 세탁기에 넣고 돌려버리면 천 부분이 상한답니다. 꼭 미지근한 물에 손빨래를 해주세요. 세탁 후에는 절대 드라이기로 말리지 마세요! 드라이기의 뜨거운 열 때문에 천이 녹거나 구멍이 뚫리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렇게 화상을 입어서 온 인형은 수술이 매우 까다로워요. 꼭 햇빛에 말려주세요. 마지막으로 인형을 항상 예쁜 마음으로 안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