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상상의 동물] 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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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1.07 09:25

해치가 죄지은 사람 응징, 화재·재앙 물리친다고 믿었죠

	사자 모양 업경대.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자 모양 업경대.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옛날에 놀부가 죽어서 저승에 갔을 때 일이야. 저승 문 앞에는 사람들이 한 줄로 서 있었지. 염라대왕이 죽은 사람을 부른 다음 "너는 살아오면서 죄를 몇 번이나 지었느냐?" 하고 물으면 그 사람이 "열 번 지었습니다" 하고 대답했어. 염라대왕이 "이놈의 눈을 열 번 찔러라" 하면 옆에 있던 신하가 바늘로 그 사람의 눈을 열 번 찔렀어. 서른 번 죄를 지었다고 하면 바늘로 서른 번 눈을 찔렀지. 그걸 본 놀부는 머리가 아파졌어. 인간 세상에서 못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이지. 놀부는 어떻게 하면 바늘로 눈을 찔리지 않고 저승 문을 통과할까 궁리하다가 좋은 수를 떠올렸어. 드디어 놀부 차례가 됐어. 염라대왕이 죄를 몇 번이나 지었느냐고 묻자 놀부가 태연하게 "저는 치매에 걸리는 바람에 통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지. 그 말을 들은 염라대왕은 "여봐라. 업경대(業鏡臺)를 가져오너라!" 하고 외쳤어. 그러자 호랑이하고 비슷하게 생긴 동물이 등에다 커다란 거울을 지고 왔어. 놀부가 '이런 신기한 거울이 있나' 하고 쳐다보자 인간 세상에서 살면서 나쁜 짓을 한 장면들이 하나씩 거울에 떠오르는 거야. "이놈이야말로 악질 중의 악질이다. 나도 이런 놈은 처음 본다. 이놈은 일 년 내내 쉬지 말고 눈을 찔러라!" 염라대왕이 호통을 쳤어. 놀부의 꾀는 업경대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고야 말았단다.

업경대는 아무나 들고 다닐 수 없어. 사람이 업경대를 들고 다니면 신비한 힘을 잃게 돼. 반드시 정의로운 동물인 '해치'가 들고 다녀야 해. 불교에서는 사자가 옳고 그름을 가려 주는 정의로운 동물이라고 알려져서 사자가 업경대를 지고 다니기도 해.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불교가 왕성하던 시기에는 사자가 업경대를 진 그림이 많았어. 이후 점차 해치가 업경대를 지는 것으로 바뀌었지.
	(왼쪽부터)해치도, 경기대박물관 소장(wikimedia commons)·백악춘효, 안중식 그림(1915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왼쪽부터)해치도, 경기대박물관 소장(wikimedia commons)·백악춘효, 안중식 그림(1915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왕도 두려워하는 동물, 해치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상의 동물인 해치를 숭배했어. 해치는 소의 머리에 날카로운 외뿔을 가지고 있으며, 온몸에는 푸른 용 비늘이 돋아나 있어. 사악한 사람을 보면 단숨에 알아보고는 달려들어서 뿔로 들이받아 버리지. 해치라는 말은 '해님이 보낸 벼슬아치'의 줄임말이야. 모든 생명을 자라게 하는 해님이 해치를 대신 파견해 죄지은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거야.

그래서 해치는 조선시대에 관리들을 감찰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헌부(지금의 법원)의 상징으로 여겨졌어. 대사헌(사헌부의 우두머리)이 입는 관복의 흉배에는 해치 그림을 새겼지.

우리나라 국회의사당이랑 대검찰청 앞에도 해치상이 서 있어. 항상 정의의 편에 서서 법을 공평하게 집행하라는 뜻이지. 해치는 왕도 두려워하는 동물이었어. 왕들이 나쁜 사람 편에 서거나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으면 해치가 나타난다고 알려졌거든.

불을 다스리고 화를 막아주는 고마운 동물

광화문 앞에도 해치상을 세웠어. 왜냐고? 그건 말이야, 해치가 또 다른 능력이 있기 때문이야. 해치는 신기하게도 불을 먹고 살아. 해치는 불만 보면 달려가서 불을 다 빨아들여 버려. 아마도 해님이 보낸 관리라서 뜨거운 불을 먹는 재주를 가졌나 봐.

왕이 사는 경복궁에 불이 자주 났기 때문에, 흥선대원군 때 그것을 막으려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 해치상을 세웠어. 안중식의 '백악춘효(白岳春曉)'는 광화문이 일본에 의해 헐리기 이전의 경복궁을 그린 거야. 이 그림이 그려지고 난 2년 후 광화문은 옮겨지고 일제가 세운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섰어. 안중식의 그림을 보면 군사들이 없어도 두 마리의 해치가 경복궁을 든든하게 지켜 줄 것만 같아. 나쁜 재앙이 경복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치들하고 싸워야 해. 경복궁의 해치들은 그렇게 배치가 돼 있어.

일반 백성들도 해치를 좋아했어. 백성들은 무명 화가들이 그린 해치 그림을 사다가 주로 부엌문에다 붙였어. 그러면 해치가 불을 잘 다스려 집안의 화를 막아준다고 믿었거든. 민화에서는 해치를 외뿔도 그리지 않고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그려서 친근감이 들게 했어. 그러니까 모든 해치에 뿔이 달린 건 아니야. 그리는 사람에 따라서 모양이 조금씩 달라졌거든.
현암주니어 ‘옛 그림에 숨어 있는 상상의 동물’ (글 이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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