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 무서워!"

"내리막길이니까 아빠 손 꽉 잡아. 낙엽 미끄러우니까 조심해."

지난 10일 서울 양천구 지양산.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둑해진 저녁, 서울 신은초등학교 학부모와 학생 200여 명이 야간 산행 길에 올랐다. 좁다란 산길은 부자·부녀가 나누는 대화와 낙엽 밟는 소리로 가득 찼다. 가파른 내리막을 지날 때마다 아이들은 아빠의 커다란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신은초 아버지회가 준비한 '아빠와 함께하는 지양산 야간 산행' 현장이다. 아빠들은 바쁜 일상에도 한 달 동안 짬을 내 이날 행사를 준비했다.

"우리 딸 승부욕이 이렇게 강했다니"

"연희 아빠, 내가 먼저 올라가서 퀴즈 준비할 테니까 8분 후에 다 같이 올라와요!" 한별 아빠 임선일(39)씨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버지들은 서로 자녀 이름을 붙여 '○○ 아빠'라고 부른다.

산 중턱에는 스피드 퀴즈, 제기차기, 신발 멀리 던지기 등 게임이 마련됐다. 우승자에게는 학교 앞 떡볶이집 쿠폰, 문화상품권, 외장하드 등 선물이 쏟아졌다. "방금 신발 날린 애가 우리 나영이에요. 저렇게 승부욕이 강한 줄 몰랐어요. 애들은 집과 학교에서 행동이 다르다고 하잖아요. 그동안 몰랐던 면을 알게 되니 새롭고 재밌습니다(웃음)." 나영 아빠 박상국(48) 씨가 말했다.

가장 인기 있던 이벤트는 '유령 놀이'였다. 몇몇 아빠가 출발 한 시간 전부터 하얀 소복을 입고 눈이 파란 귀신으로 분장한 채 나무 뒤에서 아이들을 기다렸다. 친구 부모님이 분장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아빠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김지윤(4학년) 양은 "아버지회가 여는 행사에 한 번 다녀오면 며칠 내내 아빠랑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이날 하이라이트는 '작은 음악회'였다. 지유 아빠 이명식(39)씨의 기타 반주에 맞춰 아빠와 아이는 한목소리로 '젊은 그대' '개똥벌레' 등 노래를 불렀다. 강윤서(3학년) 양은 "아빠가 맨날 밤 10~11시나 돼야 집에 오니까 같이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아빠가 아버지회에 가입하고서 사이가 부쩍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아빠가 저랑 시간을 보내려고 아버지회 활동에 꼬박꼬박 참여하신다고 했어요. 아빠를 다시 보게 됐죠."

“아빠들도 아이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아빠들은 야간 산행을 준비하며 지양산을 5번 이상 올랐다. 혹시 모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안전한 코스를 탐색하고, 주변 조명을 체크했다. 평일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모여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이벤트도 기획했다.

신은초 아버지회는 2013년 이웃에 살던 아빠 6명이 뜻을 모아 시작했다. 창립 회원인 임선일 씨는 “우리 아빠들도 아이들과 더 친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방법을 모르고 기회도 없었다”고 말했다. “제 윗세대 아버지들은 경제 활동만 하고 자녀 교육에는 신경 쓰지 않았어요. 자식들은 늘 아버지를 어려워했죠. 우리는 아이들과 어릴 때부터 추억을 많이 만들고 거리감을 좁히고 싶었습니다.”

이 같은 취지에 공감하는 아빠들 수는 매년 늘었다. 현재는 320여 명이 회원으로 활동한다. 전교생 규모(1100여 명)의 30%쯤 된다. ‘한마음 운동회’ ‘운동장에서 열리는 1박2일 캠프’ ‘화천 산천어 축제’ 등 계절별로 각종 행사를 준비한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아버지들이 일일 명예교사가 돼 ‘직업 설명회’를 열기도 한다.

“아빠들은 아직도 아이와 하고 싶은 일이 많아요.” 회장을 맡은 정호 아빠 김동영(48)씨가 말했다. “이번 겨울에는 아이들과 딸기를 따러 농장에 가볼까 해요. 겨울이 끝나갈 즈음엔 아빠들이 또 머리를 맞대고 내년을 위한 아이디어 회의를 해봐야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