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두 어린이는 고(故) 김수환(1922~2009) 추기경 이야기만 나오면 사뭇 진지해졌다. 두손을 모으고는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유언"이라고 웃음기가 가신 표정으로 말했다. 이경훈(경기 고양 백송초 4)·정상현(경기 화성 석우중 1) 군은 지난달 30일 개봉한 영화 '저 산 너머'에서 형제 역할을 했다. 한국인 최초로 추기경(가톨릭교회에서 교황을 보좌하는 최고위 성직자) 자리에 오른 김 추기경의 어린 시절을 다룬 영화다. 경훈이가 김 추기경을, 상현이가 형 고(故) 김동한(1919~1983) 신부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 본사에서 형제와 마주 앉았다.

땀 줄줄 무더위 덕분에 나온 '인생 연기'

영화에서 의좋은 형제로 나온 둘은 인터뷰 자리에서도 틈만 나면 손을 꼭 잡고 극 중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며 쉴 새 없이 재잘댔다. 경훈이가 까르르 웃으면 상현이는 "귀여워"를 연발했다. "김동한 신부는 동생에게 모범을 보여준 형이었어요. 먼저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동생이 갈 길을 앞서 걸어가면서 안내해줬죠."

상현이는 실제로 천주교 신자다. 그래서 더욱 이 역할을 하고 싶었단다. "할머니가 전 세계 추기경 이름을 다 외울 정도로 독실하세요. 할머니께 김 추기경님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 그래서 오디션을 진짜 열심히 준비했어요. 대사를 녹음해서 24시간 계속 켜뒀어요. 그랬더니 나중엔 입에서 대사가 줄줄 나오더라고요." 가만히 듣던 경훈이도 맞장구쳤다. "전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대본이 이해될 때까지 계속 읽었어요. 아빠가 놀 땐 놀고, 연기할 땐 연기하고, 공부할 땐 공부하라고 하셨거든요. 아! 오디션 붙으면 게임 '현질'(온라인 게임 아이템을 현금을 주고 사는 것)해준다고 하셔서 더 열심히 했어요. 하하. 경쟁률이 260대1이었는데 결국 주인공으로 뽑혀서 약속 지키셨어요!" (경훈) "그래서 게임하면 경훈이가 매번 이겨요."(상현)

게임 이야기를 할 땐 영락없는 아이들이었지만 연기에 임하는 자세는 진지했다. 촬영은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 지난해 5월부터 6개월 동안 진행됐다. 두 '예비 신부'는 묵묵히 열기를 참아냈다. 영화에는 어린 김 추기경이 커다란 항아리 안에서 가족 얼굴을 그리워하며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경훈이는 이 장면을 찍기 위해 수시로 열로 달궈진 옹기에 들어가 땀범벅이 된 채 연기에 집중했다. 상현이는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아버지가 밉다'며 엉엉 울어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햇볕이 따가워 결국 눈물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덕분에 현실감 있는 연기가 나오기도 했다. "일본인들이랑 싸우다가 피범벅이 된 경훈이를 업고 오르막길을 내달리는 장면을 찍는데 땀이랑 피 분장이 계속 눈으로 흘러서 앞이 안 보이고 힘들어 죽을 것 같은 거예요. 오만상을 쓰면서 겨우 달렸는데 덕분에 '인생 연기'가 나왔어요. 가장 힘들면서도 가장 행복한 날이었어요."(상현)

"우리 칸 영화제에서 다시 만나!"

'저 산 너머'에는 김 추기경의 첫사랑 누나, 동네 친구, 어린 조카 등 어린이 배우가 많이 등장한다. 또래 배우끼리 금세 가까워져 촬영 현장은 내내 화기애애했다. 웃음도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장면 리허설을 하고 있는데 동화(김 추기경 조카 역)가 그만 방귀를 '뿡!' 뀌어버린 거예요. 촬영 전에 초코파이랑 청포도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만…. 감정 잡고 울어야 하는데 한 명이 '풉!' 소리를 내니까 웃음 바이러스가 퍼져서 다들 으하하 웃어버렸어요."(경훈)

촬영과 학교생활을 동시에 챙기기란 쉽지 않았다. 주인공 역을 맡아 일정이 빡빡했던 경훈이는 6개월 동안 학교에 간 날을 손에 꼽을 정도다. 상현이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밖에 등교하지 못했다. 그래도 촬영이 일찍 끝난 날은 피곤해도 꼭 학교에 갔단다. 상현이가 "요즘은 온라인 수업을 해서 미리 들을 수 있는 수업은 어제 다 듣고 왔다"고 말하자 경훈이가 울상을 지었다. "나는 엄청 밀렸는데! 며칠 정신없이 시사회 다니느라 어쩔 수 없었어."

둘의 꿈은 같다. 앞으로도 계속 배우를 하는 것. 둘은 액션 영화를 찍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나중에 형이랑 꼭 연기대상에서 만나고 싶어."(경훈) "그래 그래. 또 같이 찍어서 손잡고 가자. 목표를 다시 정하자. 칸! 프랑스 칸 영화제로 가자!"(상현) "그래, 우리도 '기생충'처럼!"(경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