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공격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디론가 숨고자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벙커'를 짓는다. 위험천만한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 말이다. 전쟁이나 테러가 났을 때, 바이러스가 퍼졌을 때 사람들은 안전한 피신처인 지하 벙커를 떠올렸다.

전쟁 나면 대통령은 어디로 갈까?

최근 미국 방송 CNN 등 외신은 "지난달 29일(현지 시각) 저녁 흑인 조지 플로이드 죽음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백악관 앞으로 몰려들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지하 벙커로 한 시간 동안 피신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방문한 지하 벙커의 정식 명칭은 백악관 이스트윙 지하에 있는 '대통령비상작전센터(PEOC)'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곳으로, 핵 공격에도 끄떡없다고 한다. 국가 위기 상황이 닥칠 때마다 대통령과 참모진은 이곳으로 피신한다. 2001년 9·11테러 당시에도 딕 체니 부통령과 백악관 참모들, 대통령 부인 로라 부시 여사가 이곳으로 긴급 대피해 대책을 논의했다. 이 외에도 펜실베이니아주(州) 레이븐록 산맥, 콜로라도주 샤이엔 산맥 지하에 미국 정부가 지은 대규모 지하 벙커가 있다.

중국 정부도 두껍고 단단한 석회암 동굴 안에 벙커를 지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중국 주요 지도자들의 집무 공간인 베이징(北京)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약 20㎞ 떨어진 곳에 '동굴 벙커'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국 지도부가 대피하기 멀지 않은 거리다. 유사시 이곳에서 중요한 군사 결정과 명령을 내리게 된다. 지하 벙커는 비행기와 탱크가 들어갈 수 있는 넓은 터널, 원자폭탄에서 생성된 방사성 오염 물질을 걸러내는 환기 시스템을 갖췄으며 1000명 이상 수용 가능하다고 한다.

미국·중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 정부는 냉전 시대 당시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지하 벙커를 앞다퉈 지었다. 우리나라 청와대 지하에도 '국가위기관리센터 상황실'이라고 불리는 벙커가 있다. 1975년 박정희 전(前) 대통령 시절 지은 것으로, 국가 안보와 관련된 회의를 이곳에서 진행한다.

코로나19 피해 지하로, 지하로…

세계정세가 불안해 전쟁 위험이 커질 때마다 미국에서는 지하 벙커 사업이 호황이다. 최근에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일반인용 벙커 제작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 미국 CNBC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 벙커 건설 업체 라이징에스의 최근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배나 늘었다. 벙커에는 주방과 욕실, 침실은 기본이고 체육관·수영장·볼링장·영화관·사격장까지 설치할 수 있다. 핵먼지를 제거할 수 있는 최첨단 공기 필터와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시설, 물탱크까지 있어 외부와 단절된 채로 수년 동안 벙커에서만 지낼 수 있다고 한다. 라이징에스 관계자는 "우리 벙커 안에선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며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벙커 가격은 3만9500달러(약 4800만 원)부터 835만 달러(약 100억6000만 원)까지 다양하다.

기존 군사 시설을 활용해 개인 벙커를 마련하기도 한다. 미국 캔자스주의 '서바이벌 콘도'는 1960년대에 지은 미사일 격납고를 개조한 벙커다. 냉전이 끝나고 일반인에게 팔리고 있다. 85㎡(약 26평)부터 약 2만8000㎡(약 8470평)까지 규모가 다양하며, 각 가구에는 1인당 5년치 식량이 비축돼 있다. 가격은 150만~450만 달러(약 18억~54억3000만 원) 수준이다.

미래 벙커, 지상으로 나오다

미래에는 벙커가 더 이상 지하에 머물지 않고 지상으로 나올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러시아 건축사무소 모던하우스는 미래 벙커 '사이버하우스' 디자인을 소셜미디어(SNS)에 공개했다.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외벽을 여러 겹 겹쳐 허리케인이나 지진, 방사능 오염 같은 재난에 견디도록 했다. 지하 벙커와 달리 땅 위에 있는 만큼, 채광이 좋다는 것이 사이버하우스의 장점이다. 피난 중에도 강화 처리된 특수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일광욕을 할 수 있다. 에너지는 태양광과 풍력을 이용해 생성하며 최대 7명이 1년 동안 쾌적하게 살 수 있다. 출입문은 공기 압력을 이용해 여닫도록 설계돼 외부 침입자가 아무리 세게 밀어도 뚫고 들어올 수 없다. 사이버하우스를 설계한 수석 건축가 알렉스 위제프스키는 "이미 러시아·스페인·미국에서 제작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며 "사이버하우스가 보여준 비전이 곧 현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