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라면 시장에서 '한류(韓流)' 바람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지난해 라면 수출액이 6억362만 달러(약 6700억 원)로, 한국 라면 수출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년도 매출액보다 29.3%나 증가했다. 한국 라면의 인기는 일부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중국·동남아시아 등 다양한 나라에서 우리 라면을 찾는다. 매운맛에 익숙지 않은 서양인들은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라면에 포크질을 하고, 러시아인들은 마요네즈를 넣은 라면 국물을 훌훌 마시며 추위를 이겨낸다. 60여 년 동안 한국인의 든든한 한 끼를 책임졌던 라면이 이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과연 그 비밀은 뭘까.

농심 라면 매출액만 1조 원 넘어

지난해 라면을 가장 많이 수출한 회사는 신라면과 짜파게티, 너구리 등을 판매하는 '농심'이다. 현재 미국·중국·일본·동남아·유럽 등 100여 국에 라면을 팔고 있다. 수출액만 3억4950만 달러(약 3899억 원)를 기록했다. 해외 법인 판매액까지 합치면 9억9050만 달러로, 1조 원을 넘어섰다. 이 밖에 삼양은 작년 한 해 3703억 원, 팔도는 620억 원어치를 수출했다.

이 같은 열풍에는 한류가 확산하면서, 한국 콘텐츠에 자주 등장하는 라면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영화 '기생충'도 크게 기여했다. 기생충에 등장하는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로 인해 짜파게티와 너구리 매출액이 급증했다. 한국 라면의 성공적인 현지화 전략과 함께 코로나19로 인한 '집콕' 추세도 긍정적 영향을 줬다. 윤성학 농심 홍보부장은 "이전에는 해외에서 라면이 간식으로 여겨졌는데, 코로나 이후에는 한 끼 식사로 인식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한국식 매운맛'에 매료되다

한국 라면의 인기 '종목'은 나라마다 다르다. 농심의 경우 미국에서는 '신라면' 다음으로 '육개장 사발면'이 잘 팔린다. 전자레인지 조리 문화가 발달해서다. 다음으로 '생생우동'이 많이 판매된다. 가쓰오부시 국물 맛을 아시아에서 온 별미(別味)로 즐기기 때문이다. 한국 라면은 '프리미엄' 제품으로 통하기도 한다. 신라면의 경우 개당 1달러 안팎인데, 일본 라면은 3~4개에 1달러 수준이다.

삼양식품은 중국에서 해외 수출액의 50%를 기록하고 있다. 불닭볶음면의 차별화된 매운맛이 인기 요인이다. 중국 음식은 마라 같은 향신료 위주의 강한 매운맛이 대부분이다. 한국 음식은 고추장을 사용해 비교적 달콤하면서도 매운맛을 낸다. 이런 독특한 매운맛이 중국 소비자들에게 새롭게 다가갔다는 분석이다.

베트남에선 볶음면, 러시아에선 사각 용기 컵라면 인기


러시아에서는 '라면＝도시락면'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시장에서는 국물 없는 볶음면 매출이 높다. 팔도의 '비빔면' '일품짜장면' '불낙볶음면'이나 오뚜기의 '진짜장' '북경짜장' 등이 인기다. 베트남은 자체 면류 시장이 커 증가세가 더욱 가파르다.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구사하는 삼양은 세계 무슬림 인구의 60% 이상이 동남아에 산다는 점을 고려해 불닭볶음면 진출 초기부터 한국이슬람중앙회(KMF)와 인도네시아 할랄 위원회에서 할랄 푸드 인증을 받았다.

러시아에서는 팔도의 컵라면 ‘도시락’<사진>이 국민 라면으로 사랑받는다. 도시락이 라면을 대표하는 고유명사로 통할 정도다. 러시아 용기 라면 시장의 60%를 도시락이 차지한다. 도시락이 러시아로 넘어간 건 1990년대 초반이다. 부산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던 배의 선원과 상인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유는 ‘사각형 용기’에 있었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먹기에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도시락 라면은 덜컹대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도 먹기 편했다. 칼칼한 매운맛도 추운 러시아 지역에서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팔도는 1997년 러시아 현지 법인을 세우고 치킨·버섯·새우를 추가해 현지화된 맛을 출시했다. 마요네즈 사랑이 각별한 러시아인 입맛을 고려해 마요네즈를 별첨한 ‘도시락 플러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러시아에서의 도시락 누적 판매량은 2019년까지 54억 개. 러시아인 1인당 3개씩은 먹은 셈이다.

‘라면 종주국’ 일본 자리 넘본다

유로모니터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라면 통계에 따르면, 농심은 2019년 한국 기업으로는 최초로 세계 라면기업 5위(점유율 5.3%)에 이름을 올렸다. 1위는 중국의 캉스푸다. 14억 인구의 중국 내수 시장을 발판으로 선두를 차지하고 있다. 2위는 인스턴트 라면을 최초로 개발한 일본의 닛신, 3위는 인도네시아의 인도푸드, 4위는 일본의 토요스이산이다. 2020년 농심은 3년 만에 점유율을 5.7%로 끌어올렸다.

국내 라면 업계는 세계 시장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차별화된 전략을 추진한다. 먼저 농심은 한국의 맛을 유지하면서 해외 시장을 공략하는 쪽에 무게를 둘 방침이다. 지난달 27일 별세한 신춘호 전 농심 회장은 평소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지 말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 방식대로 가자. 한국의 맛이 가장 세계적인 맛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에 반해 삼양은 더욱 세분화된 현지화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불닭볶음면 외에 다양한 제품을 출시하기로 했다. 미국에서는 히스패닉이 즐겨 먹는 핫소스인 ‘타파티오’의 매콤한 맛과 향을 구현한 ‘타파티오 라면’을 앞세워 주류 시장 진입을 가속화하며, 순한 맛에 익숙한 서양인 취향에 맞는 신제품도 선보인다. 인도 시장 진출도 본격화한다. 채식 인구가 많은 현지 시장 특성을 고려해 ‘비건 라면’ 라인업을 강화할 예정이다.

한국라면의 역사

라면 역사는 1958년 일본 닛산식품이 생산한 ‘치킨라면’에서 시작됐다. 한국에 들어온 건 그로부터 5년 뒤였다. 삼양식품이 일본 묘조식품의 기술을 전수받아 국내 최초 라면인 ‘삼양라면’을 선보인 것이다. 1960년대에 정부가 ‘혼분식 장려 운동’*을 주도하면서 라면 종류는 다양해졌다. 풍년라면(풍년식품), 해표라면(동방유량) 등 8개 제품이 출시됐다. 하지만 시장 점유율은 삼양라면이 80%로 압도적이었다. 1969년에는 삼양식품과 농심만이 남았다. 1980년대는 ‘라면의 황금기’였다. 지금까지 사랑받는 한국 대표 라면들이 이때 쏟아져 나왔다. ▲농심 ‘너구리’ ‘육개장사발면’ ‘안성탕면’ ‘짜파게티’ ‘신라면’ ▲팔도(당시 한국야쿠르트) ‘팔도비빔면’ ‘도시락’ ▲오뚜기 ‘진라면’ 등이다. 2000년대부터는 해외 진출을 본격화했다. 라면 업체들은 미국·중국·유럽뿐 아니라 남미·중동·오세아니아 등 세계 각국으로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특히 신라면은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 스위스 융프라우, 남극으로 가는 길목인 칠레 푼타아레나스 등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판매되고 있다.

*혼분식 장려 운동: 1960~70년대에 국내 쌀 생산량이 모자라 정부는 ‘혼분식 장려운동’을 시행했다. 혼식은 밥을 지을 때 일정량의 잡곡을 넣는 것을 의미하고, 분식은 밀 같은 다른 곡식으로 끼니를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대(對)국민 캠페인을 통해 사람들은 라면, 수제비, 칼국수 등을 먹었고, 음식점에서는 밥에 보리쌀이나 면류를 25％ 이상 혼합해 판매했다. 학교에서는 매일 도시락에 잡곡과 면류를 섞어서 싸왔는지 검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