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당근이세요?" "당근 맞아요."

아파트 어귀나 대형 마트 앞, 지하철역 출구 근처 등 동네 사람이 알 만한 곳이라면 종종 들을 수 있는 수상한 대화. 중고(中古) 생활용품을 사려는 사람과 팔고자 하는 사람을 연결해 주는 모바일 앱 '당근마켓'이 만든 새로운 거래 풍경이다. 전 국민을 '당근'으로 만든 당근마켓은 최근 단순한 중고 거래 플랫폼을 넘어 지역 주민을 잇는 커뮤니티로 주목받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생활 반경이 좁아지고 가능하면 집 근처에서 모든 일을 해결하려는 사람이 늘면서 당근마켓 등 '하이퍼로컬' 서비스가 떠오르는 추세다.

하이퍼로컬은 '매우' '지나치게'라는 의미의 영어 표현 '하이퍼(hyper-)'에 '지역' '주민'을 뜻하는 '로컬(local)'을 더한 단어다. '아주 좁은 범위의 지역 특성에 맞춘 것'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비스' 등을 일컫는다. 비슷한 말로는 '슬리퍼를 신고도 오갈 수 있는 가까운 생활권'인 '슬세권(슬리퍼＋역세권)'이라고도 한다. 우리 삶 속에 들어온 하이퍼로컬이 비(非)대면 시대에 발맞춰 새롭게 만들고 있는 오프라인 문화는 어떤 모습일까. 지난 한 달간 당근마켓 속 하이퍼로컬 세상을 들여다봤다.


이웃과 마음 나누는 하이퍼로컬 세상으로

"드라이버 하루만 빌려 주실 분 있나요?" "○○역 앞에 있던 카레 전문점이 문을 닫았네요."

당근마켓의 '동네생활' 게시판은 주변 이웃의 도움을 요청하거나 지역 정보를 공유하는 글이 올라오는 곳이다. 앱에서 사용하는 키워드는 '같이해요' '동네맛집''해주세요' '분실/실종센터' '동네소식' 등. 당근마켓에서는 이용자가 인증한 GPS 위치에서 2~6㎞ 반경의 이웃끼리만 거래할 수 있다. 게시판에도 자신의 인근 지역에서 올린 글만 보인다. 지난 3월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MBC '놀면 뭐하니?'를 통해 방송인 유재석이 당근마켓을 이용하는 장면이 전파를 타면서부터는 게시판 방문자 수가 크게 늘었다. 유재석은 급하게 가게를 비워야 하는 주인을 위해 미용실을 지켜 주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고 싶었던 주부에게 특별 강습을 하는 등 이웃과 마음을 나누는 하이퍼로컬 커뮤니티의 순기능을 몸소 보여 줬다.

기자는 '나라면 이웃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강아지 산책 도와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했다. 반려견을 길렀던 예전 경험을 되살리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산책을 시킬 수 없는 견주(犬主)들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글을 게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가 도착했다. 기자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반려견 산책이 어렵다는 보호자 강혜인(26·서울 영등포구)씨의 집을 방문했다. 비숑 프리제 종(種)인 베르디(8)와 푸치니(4) 모녀(母女)가 입구에서부터 기자를 반겼다. 근처 공원과 반려견 놀이터를 2시간여 걷고 돌아오자 이들은 만족한 듯 잠에 빠졌다. 강씨는 당근마켓에서 반려견 산책을 맡긴 것이 벌써 5번째라고 했다. 그는 "주로 부모님의 반대나 주거 환경 등의 이유로 반려견 기르기를 포기한 주민에게 도움을 받는다"며 "그들은 반려견과 시간을 보내서 좋고, 견주는 산책을 맡길 수 있어 윈-윈(win-win)인 셈"이라고 말했다.

"함께할 이웃 구합니다"

최근 당근마켓은 지난 3월 한 달간 1회 이상 앱을 이용한 '월간 이용자 수(MAU)'가 15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재화나 서비스 등이 유통되는 모바일 전자 상거래 업계 전체에서 쿠팡(약 2300만 명)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누적 가입자 수는 2000만 명. 우리나라 인구 5명당 2명 가까이가 '당근'을 하는 셈이다. 당근마켓 측은 이를 두고 "중고 거래 자체가 아니라 '동네 기반 서비스'에 더욱 집중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당근마켓 체험을 시작하고 맞은 첫 번째 주말. 기자는 '동네생활' 게시판을 통해 배드민턴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다. 준비물인 배드민턴 라켓과 셔틀콕은 중고 거래로 마련했다.

새것에 가까운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도착한 공원에는 3명의 '당근 친구'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어색하지 않을까'했던 걱정도 잠시, 함께 땀을 흘리는 동안 금세 분위기가 풀렸다. 대부분이 혼자 온 사람이었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조유나(31·서울 영등포구)씨는 "혼자서는 꾸준히 운동하기가 어려워 나왔다"며 "모바일 앱으로 얼마든지 함께 운동할 사람을 찾을 수 있으니 이제는 운동을 미룰 변명도 없다"며 웃었다.

오후에는 당근마켓으로 무료 그림 강좌를 여는 정희주(42)씨를 만났다. 기자는 정씨의 도움을 받아 평소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태블릿PC와 전용 연필로 그림 그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운동도 치킨도 '당근 친구'와 함께

서울시가 최근 밝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서울 전체 가구의 3분이 1 이상이 1인 가구다. 당근마켓이 제공하는 하이퍼로컬 커뮤니티의 인기는 1인 가구 증가와도 관련이 있다. 혼자 생활하다 보면 장을 보거나 배달 음식을 주문해 먹을 때 아쉬운 점이 많다. 뭐든지 많이 살수록 저렴하기 때문이다. 기자는 이번 기회에 당근마켓을 활용해 야식(夜食)으로 배달 음식을 즐기기로 했다. 혼자 먹다 매번 남기는 바람에 선뜻 주문하기 어려운 치킨을 주문하고 글을 게시했다. "저와 치킨 반 마리 나눠 드실 분 없으신가요?" 기자와 같은 이유로 배달 음식을 즐기지 못한다는 서은재(26·서울 영등포구)씨와 치킨 나눔을 했다. 서씨는 "당근마켓으로 대형 할인 매장에서 여러 개를 한꺼번에 판매하는 물건을 사서 나눈 경험이 있다"며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중고 물건뿐 아니라 새 상품까지 훨씬 더 저렴하게 물건을 구할 수 있다"고 '꿀팁'을 전수했다. 기자는 기쁘게 서씨와 치킨을 나누며 인사했다. "이웃끼리 치킨도 나눌 수 있다니 아직 따뜻한 세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