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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이야기
토머스 에디슨 (1847
- 1931)
미국의 발명가.
미국의 발명가인 에디슨은 평생 미국에서 살면서 연구활동을 했습니다. 에디슨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것을 만든 발명가로
1천 93개의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얻었습니다.
에디슨의 청소년기
제재소를
경영하고 있던 캐나다 출신의 아버지 새뮤얼의 셋째아들로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태어났습니다. 7세 때 가족이 미시간주
포트휴런으로 옮겨 에디슨은 그곳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개월만에 퇴학당하고 교사였던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여 지하실 한쪽 구석에 실험실을 설치하고 실험과 공작에 몰두하였습니다. 12세 때 철도의 신문팔이
소년이 되어 집에 있던 실험실을 열차 안으로 옮겼는데 1862년 이 실험실에 화재가 발생하여 차장에게 맞아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같은 해에 역장의 아이를 구해준 답례로 전신술을 배우게 되어 69년까지 각지에서 전신수로 근무하였습니다.
이때 보스턴에서 M.패러데이가 쓴 《전기학의 실험적 연구》를 읽고 설명에 복잡한 수식(數式)을 사용하지 않은 것에
감탄하여, 그 책에 나와 있는 실험을 모두 시험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소속되어 있던 웨스턴유니언 전신회사를 그만두고
전기식 투표기록기를 발명하여 69년에 첫 특허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의회에서의 표결을 전신에 의해 자동적으로 기록하는
기기였는데 채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제2의 발명인 주식시세 표시기는 남북전쟁 직후 투기붐이 일어난 월스트리트에서 5000달러에
팔려고 생각했던 것이 4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이 자금을 밑천으로 71년 뉴저지주의 뉴어크에 공장을 세우고 이곳에서
5년간 발명에 전념하였습니다. 그해에 인쇄전신기, 72년에 이중전신기, 74년에 사중전신기를 발명하였습니다. 전신기술은
1873년 공황 후 급속히 보급되었다.
에디슨이 자라난 곳
토마스 엘바 에디슨(애칭은 엘)은 미국 오하이오주 미란이라는 곳에서 2월 11일 태어났습니다.
에디슨은 어린 나이에도 실험을 시작할 정도로 호기심이 많은 소년이었습니다. 그의 고향인 오하이오주의 미란 이라는 곳은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였습니다. 19 세기 초에는 운하가 그 당시의 고속도로인 셈입니다. 미란과 휴런강을 잇는 휴런운하는
에리호로 흘러 대서양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미란은 중요한 항구이었습니다. 그러나 철도가 오하이오로 들어오게 되면서
미란을 지나지 않게 되자 교통중심으로서의 이곳의 중요성도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에디슨이 7살이 되었을 때 미시간주의
휴런 항구도시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곳에서 에디슨의 아버지는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집옆에 큰
관측 탑을 세웠습니다. 관광객들이 돈을 내고 탑에 올라 휴런호수의 경치를 볼 수 있었지만 큰돈은 벌 수 없었습니다.
가족의 막내인 에디슨은 몸이 약해서 엄마의 큰 걱정이었습니다. 이미 두 아이를 어릴 때 잃어 버렸고 에디슨의 첫 번째
생일 전에 세 번째 아이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발명의 시작
휴런항구와
가장 가까운 큰 도시인 디트로이트를 연결하는 기차철도를 보며 12살인 에디슨은 증기 기관에 매혹되어 기차에서 신문과
사탕을 파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에디슨은 기차에서 팔고 있는 과학책, 신문, 잡지, 소설, 등을 전부 읽었습니다.
그는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읽고 말겠다고 결심했지만 10권 정도 읽다가 포기했습니다. 이즈음 에디슨은 귀가 잘
안 들린 다고 느꼈고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에디슨은 그의 귀가 안 들리는 것이 큰 재산이라고 했습니다.
귀가안들리니까 일을 하는데 덜 산만하고 외부 잡음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잠도 깊게 잘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귀는 안
들렸지만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들을 잘 활용했습니다. 10대의 에디슨은 아주 기업가 적이었습니다. 휴런 항구에서
신문과 잡지를 파는 가판대를 두 개나 운영하면서 다른 소년들을 고용했습니다. 1862년에 6개월간 그 자신의 신문인
위크리 헤럴드를 발행했습니다. 철도 직원의 도움으로 기차 짐칸에서 인쇄를 했습니다. 이 신문은 지역 뉴스와 철도 관련
기사를 실었는데 기차를 이용하는 많은 독자들이 읽었습니다. 이렇게 번 돈으로 기차 짐칸에 작은 실험실을 만들었습니다.
실험실에는 병, 전지, 시험관들로 가득 했는데 화학 물질인 인을 실험하다 화재가 나서 실험실과 인쇄기를 철도 직원이
모두 내려 버렸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계속 철도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서 예기치 않은 전환점이 일어났다.
어느 날 역장의 어린 아들이 화물기차가 오고 있는데 철도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생각할 틈도 없이
에디슨은 철도로 뛰어가 아이를 안전하게 구출해 내었습니다. 보답으로 역장은 에디슨에게 아주 복잡한 철도 전신기술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16살에 전기 기사로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은 전신 부호를 말로 말을 부호로
바꾸는 빠른 판단력과 기술을 요하는 일이었습니다. 월급도 많았고 유망한 일 자리였습니다.
그의 생애를 변화시킨 전보
기차를
타면서부터 에디슨은 새로운 전신 기술을 배웠습니다. 1840년에 특허를 받은 모르스 전신기술은 19세기의 월드와이드
웹에 해당하는 것으로 에디슨은 정보 고속도로를 항해할 모든 기술을 배우고 싶어했습니다. 그 당시의 전신 기술은 여러
나라들을 연결 해주고 있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전신기술이 에디슨이 성장할 세계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주요 신문사들은
뉴스 서버스사로부터 전신기사를 사서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전화도 발명되지 않았고 이 메일, 인터넷
기술은 꿈도 꾸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다음 4년간 에디슨은 남부와 중서부 지역을 옮겨 다니며 순회 전신 기술자로 일을
했습니다. 전신기사들은 문자나 숫자를 전기 신호로 바꾸어 전선을 통해서 정보를 주고받고 하는데 이들은 메시지를 주고받고
하는 일뿐 아니라 전신 기계를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유지하는 일도 해야 했습니다. 에디슨은 실용적인 전기기술에 대해
많이 배웠고 어떻게 축전지가 작동하고 전기회로 전자기학에 대해서도 알게되었습니다. 이런 호기심이 그의 발명에 있어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의 발명 경력의 전환점
2년 후에 1871년에 그는 뉴저지주의 도시인 뉴어크에서 공장과 실험실을 차렸습니다. 뉴어크는
그 당시 숙련된 기계 기술자들의 사회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의 전신 기계를 제조하는데 필요한 기술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해 에디슨은 같이 일하든 메리 스털웰과 결혼했습니다. 1874년에 에디슨은 첫 번째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동일 회로에 의한 4중 송신 기계장치를 개발했습니다. 이 것은 전선 하나로 한 방향으로 하나이상의 통신문을
보낼 수 있는 방식이었는데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2개 통신문을 보낼 수 있는 획기적인 발명이었습니다. 전신 회사들에
있어서 이것은 대단한 발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선을 적게 쓰고도 많은 통신문을 보낼 수 있어 경비도 절감하고 많은
이윤을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디슨은 웨스턴 유니온 회사와 경제적으로 아주 유리한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돈으로
뉴저지 시골에서 "발명 공장 "이라 불려 지는 멘로파크에 거대한 실험실을 지어 많은 발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축음기와 전등
1876년 에디슨은 실험실을 뉴어크에서 멘로파크로 옮겨, 76∼81년 이곳에서 머물렀습니다. 이
시기에 발명 사업은 번창하고 월스트리트의 부자들은 그의 특허를 손에 넣으려고 다투었습니다. 1876년에는 미국독립
100주년기념 세계박람회가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어 A.G.벨의 전화기 실연이 크게 호평받았습니다. 그는 벨의 기기를
개량하여 탄소 알갱이에 의한 가변저항형 송화기를 고안하여 78년에 특허를 받았는데, 이것은 오늘날 송화기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또한 전화의 음성을 재생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1877년에 최초의 축음기를 조립하였습니다. 녹음에는 처음에
주석박을 사용했는데 78년에 이것을 납관으로 바꾸었습다. 그는 축음기를 그가 가장 아끼는 발명품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연구 과제는 전등의 실용화였습니다.
이미 1870년대에는 탄소선 사용이 유망해져서 78년부터 백열전구의 연구에 몰두한 그는 수은 배기펌프의 개량과 탄소필라멘트의
채용으로 79년 10월 21일 40시간 이상 계속해서 빛을 내는 전구를 만들었습니다. 필라멘트 재료로는 대나무가 적당하다는
것을 알고 전세계의 대나무 산지로 사람을 보내 가져오게 한 결과 일본 교토 부근의 야와타〔八幡〕의 대나무가 가장 좋다는
것이 입증되어 약 10년간 이 대나무가 사용되었습다. 또한 그는 전구소켓 · 안전퓨즈 · 적산전력계 · 지하케이블
· 정전압직류발전기 · 배전반 등 전등의 부대 설비에서 발·송전, 배전에 이르는 전기기체계(全器機體系)를 고안하였습니다.
82년에 세계 최초의 중앙화력발전소가 런던과 뉴욕에 설치되어 에디슨전등회사가 창립되었습니다. 또한 83년 전구의 실험중에
발견한 <에디슨효과>는 20세기에 들어와 열전자방출현상으로서 연구되어 진공관에 응용됨으로써 오늘날 전자공업 발전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는 또 자신이 만든 발전기와 배전설비를 이용하여 독자적인 전기기관차를 만들어 1883년부터 전기철도사업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사업가로서의 에디슨
1887년
그는 실험실을 웨스트오렌지로 옮겼습니다. 그곳에서는 45∼60명의 직원들이 그의 발명에 협력하여 그 무렵 세계 최대의
연구개발기관이 되었습니다.
88년에 축음기를 개량하였고, 91년에는 영화의 촬영기·영사기, 1891∼1900년에는 자력선광법, 1900∼10년에는
에디슨축전지 등을 차례로 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의 회사는 전등특허권을 둘러싼 소송으로 많은 비용이 들게 되어 에디슨은 회사로부터 쫓겨났습니다. 결국
전등 소송에서는 이겼지만 전력 수송의 장래에 대하여 고압 교류방식이 유리함을 간파하지 못한 것은 그의 실수였습니다.
제1차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한 뒤 한때 사업을 그만두고 해군고문회의 회장이 되어 군사기술 문제에 몰두하였습니다. 전후
다시 웨스트오렌지로 돌아와 고무대용식물 등을 연구했습니다.
창조에 대한 신조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땀이다>라는 그의 일생 동안의 신조는 지금까지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대학강의를 경멸했고 보통교육에
관해서도 <현재의 시스템은 두뇌를 하나의 틀에 끼워 넣는다. 독창적인 사고가 길러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이다>라고 비판하였습니다. 만년에는 <나는 발명을 계속할 돈을 손에 넣기 위해 항상 발명하는
것이다>라고 술회하여 끊임없이 창조 활동을 계속하였던 끈질긴 발명가의 심경을 엿보게 합니다. 밀란에 있는 그의 생가는
사적이 되었고, 미시간주 디어본으로 옮긴 멘로파크실험실과 웨스트오렌지실험실은 각각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1929년 10월 21일은 백열전구 실험에 성공한 지 50년째가 되는 해로서, 국제적인 전등 50주년제가
실시되었으며, 그가 죽은 31년에도 성대한 에디슨추도회가 거행되었습니다.
에디슨의 발명품
에디슨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것을 만든 발명가로 1천 93 개의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얻었습니다.
백열 전기 램프(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구와 비슷한 것), 영사기,축음기 들이 에디슨이 발명한 것입니다. 또한
최초로 산업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에디슨의 주요 발명품 3개>

틴 호 일
1877년 12월 6일 제작되었으며 에디슨 유성기 1호기이며 축 중앙에 놋쇠로 만든 실린더를 고정시켜 놓았고 그 위에
Wax를 씌우고 감으면서 녹음하는 방식.

에디슨 콘서트
1899년 미국에서 만들었으며 5인치의 Dia Cylinder를 사용.틴호일,클라스 엠과 더불어 에디슨 3대 걸작품이다.

에디슨 클라스 엠
1889년 미국에서 만들어졌으며 에디슨이 밤잠을 설치며 만든 두번째의 작품으로 최초의 재생기능을 가진 밀랍관 축음기로
직류모터를 사용했으며 습전지에 의한 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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