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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박


1. 불꽃같이 짧은 삶 (1877-1910)


한국인으로 첫번째로 (양)의사 자격증을 딴 사람이 서재필이란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서재필은 1892년 컬럼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인으론 첫 서양의사(MD, medical doctor)가 되었으며, 미국에서 개업해서 (정치가로 고국에 돌아오기 전까지) 당뇨병 전문의사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의사는 누구인가? 놀라운 것은 한국 사람으로 두번째 의사가 에스더 박(Esther Kim Pak, 1877-1910)라는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1900년 볼티모어에 있는 여자의과대학(Women's Medical College)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귀국, 10년간 수만명의 환자를 돌보면서 보건환경 개선과 여성의료인력 양성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2. 에스더 박의 생애


1877년 3월 16일에 태어난 박 에스더의 본명은 김점동(金點童)이다. 그녀의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본이 광산(光山)이고 그녀의 아버지가 1885년 한국에 왔던 감리교 목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의 일을 도와주던 사람이었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녀는 딸 넷 중 장녀였는데, 그녀의 여동생들 중에는 한국 최초의 간호사로 나중에 세브란스 병원의 수간호사가 된 사람도 있었고, 한국 최초의 고등학교 여교사로서 서울 장로교에서 운영하는 여학교의 교장이 된 사람도 있었을 정도로 그녀의 집안은 '개화'한 사람이 많았다.

김점동의 집은 서울 정동에 있었다. 집 근처에 감리교회 여선교사였던 매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 부인이 1886년 설립한 '이화학당'이 있어서 점동은 이 학교에 들락거릴 수 있었고, 1886년 겨울 네번째 학생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당시에 항간에는 외국인 학교에 자식을 보내면 외국인 선교사가 애들을 외국으로 팔아먹는다는 얘기가 무성했고, 선생들은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부모를 만나서 이런 얘기가 사실무근임을 설득해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김점동의 부모도 처음에는 딸을 학교에 보내는 것에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개교 초기의 이화학당은 학생들에게 한글, 한문, 성경, 산수, 가사를 가르쳤고, 해가 지나면서 고학년 학생에겐 영어와 영어로 수학을 가르쳤다. 김점동은 특히 영어에 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대부분 젊은 여성들이 집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면, 이화학당이 "동해에 갇혀있던 처녀"에게 "서녘에서 부터 오는 새로운 문명의 바람"을 마시게 하고, "갑갑한 장옷을 벗어버리고 안방 구석을 떠나던 곳"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3. 로제타 셔우드와의 만남


1890년 김점동은 그녀의 인생의 진로를 바꾸어 버린 한 여자 선교사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1865-1951)라는 미국 선교의사였다. 셔우드는 미국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빈민가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펴다가, 동대문에 있는 보구여관(普救女館)이라는 부인병원에서 진료와 수술을 담당하기 위해 1890년 한국에 파견된 여의사였다. 셔우드는 당시 이화학당을 다니던 학생중 두명을 뽑아서 자신의 일을 돕게 했는데, 그 중 한명이 김점동이었다. 점동은 영어가 뛰어나서 셔우드가 즐겨 통역을 부탁했지만, 의술이나 약에는 관심이 덜했다고 한다.

셔우드의 회고에 의하면 김점동이 의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893년 초, 셔우드가 언청이를 수술하는 것을 목격하면서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서, 김점동은 자신도 언젠가 이런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적고 있다. 그렇지만 김점동이 의사가 되기엔 난관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한국은 물론 일본이나 중국에도 여자가 다닐 수 있는 의과대학이 없었던 것이 그중 하나였고, 결혼의 압력도 또 다른 난관이었다. 당시 조선에선 기생이 아닌, 심신이 멀쩡한 여자가 나이 열여섯이 될 때까지 결혼을 안하는 것은 개인은 물론 집안의 수치로 간주되었다. 미국인이었던 셔우드 박사조차 한국에 와서 독신으로 진료활동을 하면서 주변의 이상한 시선을 의식할 정도였고,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의 약혼자인 홀 박사(William James Hall, 1860-1894; 1894년 평양에 광성학교를 설립한 사람)가 1891년 미국에서 한국으로 부임하자마자 그녀에게 서둘러 홀과 결혼할 것을 권고할 정도였다. (그녀는 1892년 6월 홀과 결혼해서 홀 부인 Mrs. Hall이 되었다). 한국의 이런 풍습을 잘 알고 있었던 스크랜턴 부인과 셔우드는 박유산이라는 젊은이를 점찍어서 김점동과 그녀의 집에 혼사를 타진한다. 박유산은 윌리엄 홀 박사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선교를 할 때 동행하면서 통역을 하고 그를 도우던 건실한 젊은이였다. 한가지 문제는 그가 돈이 없고 조금 미천한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이었다. 김점동의 어머니는 이런 이유 때문에 결혼을 반대했고, 1893년 초 김점동이 홀 부인에게 보낸 편지는 결혼과 관련해서 그녀가 겪고 있던 갈등을 잘 보여준다.

4. 결혼과 유학생활


그녀는 1892년 세례를 받아 에스더 김이 되었다. 에스더 김은 1893년 5월 박유산과 결혼, 서울과 평양에서 본격적으로 홀 부인의 의료활동을 돕기 시작했다. 1894년 11월, 발진티푸스로 갑작스럽게 남편의 죽음을 맞은 홀 부인이 남편을 기념하는 병원의 기금을 모으기 위해 미국에 잠시 돌아가기로 결정하자, 에스더는 그녀에게 이 기회에 자신도 미국에 데려가 달라고 간청한다. 에스더에게 드디어 의학을 공부할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홀 부인은 친구들로부터 에스더와 박유산의 배삯을 모아서 이 둘을 미국에 데려간다.

1895년 1월, 에스더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뉴욕에 있는 고등학교에 편입, 수학, 과학과 라틴어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한 학기 다니고 1895년 9월 그녀는 뉴욕에 있는 간호학교에 입학했다. 박유산은 미국에 도착한 이후 줄곧 부인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위해 상투를 튼 채 농장에서 노동을 했다고 한다. 다음해인 1896년 9월, 에스더 박(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이름을 바꾸었다)은 300명의 입학생 중 가장 어린 나이로 볼티모어에 있는 여자의과대학(Wome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 이후 존스홉킨스 의대에 합류)에 입학했다. 에스더는 학기 중엔 학업에 열중하고 방학에는 생계를 위해 돈을 벌었으며, 박유산은 부인과 떨어져서 뉴욕의 농장에서 힘든 노동을 계속했다.1898년 박유산은 볼티모어에 있는 식당에 취직을 하게 되어 2년만에 볼티모어에서 부인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 박유산은 이미 폐결핵으로 몸이 심하게 상한 상태였다. 그는 부인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당시 결핵에는 특별한 약이 없었다) 에스더가 의학박사학위를 받는 졸업식을 3주 남기고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5. 귀국 후 의사로서의 활동


1900년 6월 학위를 받고 바로 한국으로 돌아온 에스더는 24살의 젊은 나이에 동대문의 구제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는 선교사들에 의해 선진적인 서양 의료술이 보급되긴 했지만, 남자 의사들 앞에서 속살을 보이며 진료를 받아야 하는 탓에 여성들은 재대로 의료혜택을 받을 수없었다. 여의사가 등장하자, 그 동안 의료혜택로부터 소외됐던 여성 환자들을 그녀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 아침터 병원 앞에서 진을 쳤다 그녀는 첫 10달 동안 3,000명의 환자를 볼 정도로 정렬적인 의료활동을 펴기 시작했다. 그녀의 개복수술은 "귀신이 재주를 피운다"는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후 그녀는 평양에 있는 홀 부인의 부인병원에 합류해서, 진료와 계몽을 계속했다. 그녀는 병원에 앉아서 환자를 보는 것 만이 아니라, 평안도와 황해도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 다니면서 무료 진료를 강행했다. 엄동설한에는 나귀가 끄는 썰매를 타고 다니면서 환자를 찾아다녔다. 틈틈이 평양의 농아학교와 간호학교에서 강의도 계속했다.

수년간 계속되는 과로로 심하게 건강을 다친 에스더 박은 1909년 잠시나마 건강을 회복하는데 성공했고, 종전처럼 평양 병원에서 업무를 계속했다. 그 해 그녀는 하한사, 윤정온과 함께 수천명의 하객의 축하 속에 고종황제가 신여성(新女性)을 치하하기 위해 수여하는 메달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미 그때 그녀는 남편 박유산을 앗아간 폐결핵이 회복할 수 없는 단계로 악화된 상태였다. 주위 사람들의 간곡한 기도와 지속적인 투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910년 4월 13일, 서울의 병원에서 34살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6. 에스더 박의 영향


1910년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홀 부인의 아들인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4-1991)은 어릴적부터 이모처럼 따르던 에스더가 결핵에 걸려 죽는 것을 보고 결핵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 한국에 결핵 요양원을 세우고 결핵 퇴치에 앞장서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캐나다로 돌아가 자신의 결심대로 결핵전문의가 되고, 192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뒤 황해도 해주에 결핵요양원을 지었으며, 이후에도 한국 결핵 퇴치 운동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에스더 박의 영향은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평양에서 헌신적으로 진료를 하던 모습은 많은 한국 여성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이 중 몇명은 에스더처럼 의사가 되기 위해 홀 부인을 찾아와서 자기들에게 의술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다. 당시 의과대학이던 세브란스 의대가 여자를 받지 않아서 여성이 의술을 배울 기회는 거의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홀은 이중 다섯명의 여성에게 의술을 가르치고, 이들을 일제 의학교였던 경성의학 전문학교에 청강생으로 공부할 수 있게 하였다. 1918년 김영흠, 김해지, 안수경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함으로써 의사 자격을 얻어 각각 제물포, 평양의 광혜여병원, 서울의 구제여관에서 의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여성의사들의 활동은 이후 1928년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세우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에스더 박은 34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지만, 그녀의 불꽃같은 삶의 영향은 이렇게 후대 여성들로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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