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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이야기
페르미 Enrico Fermi (1901~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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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태리 물리학의 자존심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물리학자인 페르미는 핵반응을 발견한 공로로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특히 1944년에
맨해튼 계획에 참가해 미국의 원자 폭탄 제조의 주역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핵시대의 주요개척자 중 한 사람이었다. 원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많은 현상을 명확히 하는 데 필요한 수학적 통계를
발전시켰고 중성자 유도 방사능을 발견했으며 최초의 제어된 핵연쇄반응을 지휘했다.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미국 에너지부의 엔리코 페르미 상은 그를 기념하여 주는 상이다.
1. 미국에서의 원자폭탄제작의 동기
1938년 핵분열 현상을 발견했을 때, 독일은 이미 2년 전부터 핵에너지 개발에 착수하였다. 미국은 나치 독일의 발빠른
움직임이 곧 대량 학살 무기로 확대되는 데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독일은 원자 폭탄의 중요한 물질인 중수와
우라늄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이러한 물질은 노르웨이,체코 등 나치의 통치하에 있던 국가들에서 구한 것이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미국내 과학계는 양국간에 벌어질지도 모를 핵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핵에너지의 긍정적인 활용을 지지하고
나섰다. 평소 핵에너지의 무기 활용에 적극 반대해 온 실라르드는 미국 과학자들에게 핵 관련 연구 자료를 공개하지 않도록
당부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미국 내에서 벌어지는 관련 연구 자료를 독일이 알지 못하도록 비밀에 부치자는것과 미국의
개발 정도를 알리지 않는다는 목적이 있었다. 1939년 실라르드와 위그너, 텔러등은 아인슈타인에게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도록 요구했다. 그 내용에 페르미와 실라르드의 연구와 관련된 부분도 있다. 즉 핵에너지와 관련된 연구를
미국내에서 극비 사항으로 부쳐지는 것을 일정 정도 풀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에다 라듐은 매우 유익한 에너지로 이용할
수 있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결국 루스벨트는 우라늄의 평화적 이용을 전제로 이들의 연구를 허용하였고, 1941년 6월 28일에 이르러 원자 에너지
개발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해 12월 6일,일본의 진주만 폭격 하루 전날 결국 맨해튼 연구 단지에서 원자
폭탄 개발을 결정하게 된다.
2. 페르미 Enrico Fermi
페르미는
1901년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태어나 1954년까지 활동한 물리학자이다.
엔리코 페르미가 14살이 되던 어느날, 그는 로마거리의 구시장안으로 걸어들어가 고서적들이 즐비하던 진열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는 흥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1840년에 라틴어로 쓰여진 물리학 책이었다. 이 어린
책략가는 이미 투영기하학과 수학에서 쓰이는 다른 도구들에 관해서는 통달한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페르미는 뛰어난 암기력을 가진 덕분에 대개의 경우 책을 한번만 읽으면 그만이었다. 몇년이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단테의 <신곡>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 대부분을 암송할 수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엔리코의 학교성적은 우수했다. 대학에서 페르미는 이론에 관한 물리학 문제를 푸는데는 거의 무적에 가까웠다.
그러나 1920년대인 그때까지 물리학자란 결국 실험물리학자를 의미했다. 페르미는 엑스선의 회절에 관한 연구를 굽은
크리스탈을 가지고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에 관한 논문은 그의 박사학위 취득을 거의 확실하게 했지만, 그는 보다 안전하게
두개의 논문을 제출하였다.
그는 1922년 피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 후 그는 라이덴 대학으로 갔다. 피렌체 대학에서 강의하는
동안 그는 한 개의 전자는 원자 안에서 단지 한 양자 상태만을 점유한다는 파울리의 배타 원리를 수용하여 후에 페르미
입자라고 불리는 비대칭적 입자들에 따르는 통계법인 페르미-디랙 통계를 발전시켰다.
그는1927년
로마 대학에서 이론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로마 대학에서 직위를 얻은 후, 페르미는 자신의 실험능력을 개선시키는 데
관심을 돌렸다. 얼마 안가서 그는 기계적인 것들에 매우 정통하게 되었다. 실제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한번은
강의차 미국으로 출장을 간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는 "나르는 거북"이라는 이름의 자동차를 샀다. 도로에서 차에 어떤
문제가 생겼고 그는 근처 주유소에 차를 세웠다. 엔리코는 아주 능숙하게 차를 수리했고, 이를 지켜보던 주유소 사장은
즉석에서 일자리를 제의했다.
페르미의 실험능력은 보다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32년에 중성자가 발견한 후, 그는 중성자다발을 쏘았을 때 생겨나는
방사능을 연구하는 그룹의 장이 되었다. 이 그룹은 실험장치가 나무로된 테이블위에 놓였을 때와 비교하여 대리석위에 놓였을
때 다른 결과를 얻었기 때문에 의아해했다. 페르미는 대답을 찾았으며 천천히 움직이는 중성자들이 더 큰 방사능을 갖는
것을 발견하였다.
1933년 중성미자라 불리는 중성입자와 중성자가 전자의 형성과 함께 양성자로 변화함에 의해 방사능의 베타 분열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했다. 페르미와 로마학회는 중성자가 물과 파라핀을 통과할 때 속도가 감속되는 중성자에 의해 야기되는
활동의 증거를 발견했다. 즉, 느린 중성자는 원자로 빨려 들어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발견으로 페르미는 1938년
노벨상을 받았다.
그 후 페르미는 우라늄에 중성자로 충격이 가해질 때, 원자핵은 두 개의 동일한 조각으로 쪼개지고, 약 230 메가전자볼트(MeV)의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핵분열이다. 이 결론에 의해 맨해튼 계획이라 불러지는 핵폭탄 개발이 이루어지고
핵 폭탄이 만들어졌다.
핵분열의 가능성은 Ida Noddack에 의해서 보다 일찍 제의된 바 있었고, 페르미 또한 그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성자 다발을 이용한 그의 모든 연구에서 그는 핵분열에 관한 어떠한 증거도 발견할 수 없었다. 후에 핵분열이
발견되었을때, 페르미는 자신의 부주의로 인한 실수를 크게 나무랐다.
페르미는 콜롬비아 대학의 직위를 받아들였고, 후에는 시카고 대학으로 옮겨갔다. 그는 이동안 내내 핵분열과 연쇄반응의
가능성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하였다. 이 당시 유럽은 한창 전쟁 중이었고 미국은 이탈리아인들을 가리켜 "적국의 국민들"이라고
선포했다. 페르미의 우편물은 검열을 받아야 했고 출국 또한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초의 원자로를 고안해냈고,
1942년에 이는 임계상태에 도달하여 28분 동안 1/2와트의 전력을 일으켰다. 다음으로 그는 로스알라모스로 옮겨와
원자폭탄을 설계했다.
페르미의 비상한 암기력과 어려운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뛰어난 능력은 때로는 그를 신들린 것처럼 보이게끔 하기도 했다.
만약 페르미가 어떤 문제에 직면하여 정답을 모른다고 해도, 누군가가 몇개의 숫자를 그에게 들려주면 그는 정답에 눈을
반짝여 맞힐 것이라는 소문마저 돌기도 했다. 문제를 풀어내는 그의 능력은 실로 대단했지만, 말년에는 젊은 물리학자들의
세미나에 참석해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단지 강연의 마지막 한마디만이
그를 감동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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