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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이야기
허준
(1546~1615)

조선 선조 임금 때의 의사.
조선 중기의 의인(醫人)으로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이며 김포출신입니다.
허준은 1546년(丙午, 명종 즉위년) 3월 5일에 공암(孔岩)에서 무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허준의 할아버지는
무과 출신으로서 경상도 우수사를 지낸 허곤(許琨)이며, 아버지는 평안도 용천에서 부사를 지낸 허륜(許 )입니다. 허준은
정실부인에게서 태어난 적자가 아니라 다른 부인에게서 태어난 서자였기 때문에 문과에는 응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무과에 지원하지 않고 29세인 1574년 의과에 급제하여 내의원(궁중에 설치된
병원)에 근무하였습니다. 선조 8년(1575) 2월 15일 의관 안광익(安光翼)과 함께 선조를 진찰한 뒤 임금을 비롯한
궁중 인사의 병을 치료하였으며, 내의원에서 의술을 인정받아 내의(內醫)와 태의(太醫)를 거쳐 어의(御醫)로서 명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동의보감》을 편술하여 우리나라 의학실력을 청나라 및 일본에까지 과시하였습니다.
어의로 활동하면서 왕자의 두창(痘瘡)을 치료하여 선조로부터 궁상의 가자(架子, 정삼품 통정 대부이상의 품계)를 받았고,
1956년 유의인 정작, 태의인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등과 함께 의서의 편찬을 명 받았으나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의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일이 중단되었습니다. 하지만 허준은 임진왜란 때 어의로서 의주로 피난가는
선조 임금을 보살펴 그 공으로 1604년 6월 25일 호종공신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뒤에도 어의로서 내의원에
계속 출사하여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면서 왕의 건강을 돌보았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이후 의서의 편찬이 허준 단독에게만 맡겨지고 궁에 보관된 의서들을 참고할 수 있도록하는 선조의
배려속에 편찬을 진행하였고 1600년 10월 우두머리 의사였던 양예수가 사망함에 따라 허준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습니다.
그러나 1608년 집필이 절반도 이루어지기 전에 선조의 죽음을 맞아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허준이 매우 차가운 약을 망령되어
썼다고 하며 탄핵을 요구하며 귀향을 보내고 죄줄 것을 광해군에게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이 어릴 때 병을 고쳐주었던
것을 계기로 선조에 이어 광해군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허준을 처벌을 받는 대신 가볍게 귀향을 가는 선에서 일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허준은 짧은 시간 귀향살이를 보내고, 다시 재등용되어 말년(광해군 2년 1610년)에는 한국 의학의 대표적 의서라
할 수 있는 25권(卷) 25책(冊) 3127면의『동의보감』을 편찬하였습니다. 1615년, 광해군 7년, 8월 17일(양력
9월 9일)에 대의허준(大醫許浚)은 보국숭록대부양평군(輔國崇祿大夫陽平君)의 직위로 선조의 고향인 양천의 공암(孔岩,
강서구 가양동 24번지, 탑산(塔山)아래)아래에서 70세의 일기를 마쳤습니다.
승록대부 양평군이 보국이 된 이유는 광해군이 이조에게 명하여 내관 방준호의 예에 따라 허준을 보국(정1품으로 의정의
반열임)으로 추증하였기 때문입니다. 허준은 그 뛰어난 실력과 왕의 총애로 인해 동료 내의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으며
사간원과 사헌부로부터 건방지다 교만하다 등의 평으로 탄핵되기도 많이 하였으나 그는 죽을 때까지 이처럼 왕의 총애를
듬뿍 받은 어의로 어쩌면 동료들과의 마찰로 내의원 생활이 힘들었을지도 모르나 왕을 모셨던 의사로서는 행복한 삶을 보냈다
할 수 있습니다.
http://home.hanmir.com/~herjun/
동 의 보 감
♧ 동의보감의 호칭
동의보감이란 한국의 독자적인 보배로운 의학으로 만물을 밝게 비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제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은 허준이 동의보감을 통해 한국의학이 독자적 전통속에서 발전한 의료임을 만천하에
공개하려 하였다는 사실이다. 책 제목에 "동의(東醫)"라는 단어를 사용한 점은 신토불이사상과도 통하니, 영조 25년(1749)
조연준이 저술한 『급유방(及幼方)』에도 이러한 사상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급유방』의 "동방육기론(東方六氣論)"에서
"우리나라는 대륙의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므로 그 기후, 풍토가 중국과는 다르다.
동원, 단계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필연코 주되는 경(經)과 고유한 기후에 적응하는 저작이 있었을 것이고
약을 쓰는 표준을 만들었을 것이다."

♧ 동의보감(東醫寶鑑)
광해군 2년 1610년에 허준에 의해 25권(卷)
25책(冊) 3127면으로 편찬된 책이다. 이 책은 그 당시의 의학 지식을 총망라한 임상 의학의 백과전서로서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대 강편(綱篇)아래에 질병에 따라 항(項)과 목(目)을 정하고
그 항목 밑에는 해당되는 병론과 처방들을 출전과 함께 자세하게 열거하여 각 병증에 관한 고금의 처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병증에 따른 단방(單方, 약물이 하나인 처방)과 침구법을 덧붙여 기술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실용화할 수 있도록 기술하고 있다.
이책의 편찬 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각
병증의 항과 목이 병증을 중심으로 열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예로 내경편(內景篇)의 진액항(津液項)에 한증(汗症)의
처방을 보면, 먼저 그 맥법과 원인을 밝히고, 그 다음에 자한(自汗) 도한(盜汗) 두한(頭汗) 심한(心汗) 수족한(手足汗)
음한(陰寒) 혈한(血汗) 황한(黃汗)으로 한증을 8목(目)으로 분류하여 임상의들이 환자를 대했을 때 이 책 한 권만
있으면 많은 책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쉽게 고금의 의서들을 열람한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허준이 동의보감을 쓰기 위해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 의림촬요(醫林撮要), 천원왕책(天元王冊),본초(本草),
소문(素問), 영추경(靈樞經), 상한론(傷寒論), 맥경(脈經), 단계심법(丹溪心法) 등 모두 83종의 의서를 인용하였으니
가히 이 책만 있으면 다른 책들을 참고할 필요가 없게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놓았다.
혹자는 동의보감이 자신의 견해는 없고 중국의서들을
짜집기 해 놓은 책에 불과하다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하나의 병증에 대해 그처럼 상세하게 기술하였고, 출전까지 밝혀 다른
한방서들에 비해서 문헌적 고증이 가장 정확하며, 이 책의 완성이 만 14년간의 오랜 시일이 걸렸지만 허준 단독으로
이뤄낸 탓인지 각 편을 통하여 그 내용 설명이 전면에 걸쳐서 흐트러지지 아니하고, 찾기 편하게 편집해 놓은 것만으로도
동의보감의 우수성은 평가받아야 한다.
해외에서도 동의보감의 가치는 빛이 나니 중국 건륭 31년(1766)에 간행된 『동의보감』의 서문에서 "능어(凌魚)는
천하의 보(寶)를 천하와 함꼐 한 좌군(左君)의 인(仁)이 크다" 라고 말하였는데 이러한 평가를 받으며 중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출판되었다.
동의보감은 이러한 호평을 받으며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 귀중한 동양의 임상의학서로, 의학의 혜택이 백성들에게 고루 돌아가게 하고자한 의도는 어느 정도 후대로
이어져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으며 조선 전기에 힘쓴 향약의 보급과 중국 의서의 수집과 편찬 등을 통해 다져진 조선 의학의
잠재력을 발휘시켜 결실을 맺게 해주어 임상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하도록 하여 주었다.
또한 이후 한국 한의학을 주도해 나감으로써 한국 한의학의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허 준의 저서
대표적저서『동의보감(東醫寶鑑)』이외에도『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신찬벽온방(新纂癖瘟方)』,
『벽역신방(癖疫神方)』등이 있다.
「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 」
1581년 왕명에 의해 고양생(高陽生)의 『찬도맥결(纂圖脈訣)』을 교정하여 4권 4책으로 교정하여 편찬한 책으로
맥법 진단의 원리를 밝힌 책이다.
「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 」
1601년 노중예(盧重禮)의 『태산요록(胎産要錄)』도 다시 편찬한후 이를 언해한 책이다.
「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
임원준(任元濬)의 『창진집(瘡疹集)』을 다시 편찬한 뒤 이를 언해한 책이다.
「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
세조때 편찬된 『구급방(救急方)』에 주석을 달아 해석한 책이다.
「 신찬벽온방(新纂癖瘟方)과 벽역신방(癖疫神方) 」
1612년에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들을 구료하기 위하여 《신찬벽온방》 1권과 《벽역신방》 1권을 편집하여 내의원에서
간행, 반포하게 하였다.
전자인 《신찬벽온방》은 그 전해 12월에 함경도와 강원도 양도에서 온역(봄철에 유행하는 전염병)이 유행하여 남으로
내려와서 각 도에 전파되므로 이미 전해오던 《간이벽온방》을 다시 알기 쉽게 개편한 것이며, 후자인 《벽역신방》 은
1612년(광해군 4) 가을부터 유행하여 사망자가 많이 생겼던 전염병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듬해 다시 당독역이
유행하여 또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허준이 지은 것이다. 이 당독역은 의서에 병명이나 치료법이 없던 혹독한
질병으로 악성의 질병이었기 때문에 당자가 붙었다. 허준은 병의 증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치료법을 제시하였는데, 탁월한
안목으로 당시 의서에서 없던 이 질병의 증상으로 두통 신동 오한 고열 후의 얼굴과 몸에 붉은 색의 발진이 생기고 정신이
혼미해져 헛소리를 하며, 앓고 난 후에는 머리가 모두 빠지고 열독으로 피부가 말라 벗겨진다고 하였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날의 성홍열의 증상을 그대로 기술한 것과 같다.
따라서 두진이나 마진과 혼동하기 쉬운 이 병에 대해 1613년 이렇게 정확히 병증과 요법을 기술한 것은 이 책이 세계
최초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세계병리학사상 허준의 업적은 크게 평가받아야 하며 이 책을 통해 조선의
의학, 특히 전염병학은 세계적 수준으로 발돋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허준의 이러한 의학지식과 탁월한 견해는 『동의보감』을
편술한 후 더욱 완숙해져 이러한 『벽역신방』과 같은 매우 탁월한 과학적 의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러한 의방서들의 편찬은 《동의보감》과 함께 우리나라 명의로서의 관록을 더욱 자랑할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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