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바나나 껍질을 밟아본 적이 있나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상대방을 골탕 먹이려고 미끄러운 바나나를 바닥에 몰래 두는 장면이 있는데요. 온라인 게임에서는 자동차가 도로 곳곳에 놓인 바나나를 피해 달리기도 하죠. 옛날에는 이 미끄러운 바나나 껍질로 5만t(톤)급 대형 화물선을 움직이게 한 사건도 있었답니다. 1941년 미국 텍사스주의 버몬트 지역에서는 새로 건조한 배를 바다에 띄우는 행사가 진행됐는데, 당시 배를 미끄러지게 하는 오일이 부족해 무려 3.4t의 바나나가 사용됐죠. 바나나 껍질 덕분에 화물선은 순조롭게 바다를 건널 수 있었어요. 그렇다면 왜 바나나 껍질을 밝으면 미끄러지는 걸까요?

바나나 껍질 안쪽은 마이크로미터(μm) 크기의 동글동글한 과립 수억 개로 이뤄져 있어요. 이 과립들은 아주 얇은 셀룰로오스 막으로 둘러싸인 젤(gel) 상태랍니다. 그런데 껍질을 밟는 순간, 과립들이 짓눌리고 막이 터지면서 안에 있던 내용물들이 흘러나와 졸(sol) 상태로 변해요. 젤리처럼 말랑말랑한 고체 형태인 젤 과립이 액체 형태인 졸 상태로 변하면서 훨씬 미끄러워지는 거죠.

바나나의 성질을 관찰한 일본 기타사토대 마부치 기요시 교수는 재미난 실험을 통해 바나나 껍질이 얼마나 미끄러운지 알아냈어요. 마부치 교수는 발바닥과 바나나 껍질 사이의 미끄러운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마찰계수를 측정했답니다. 마찰계수는 두 표면 사이의 마찰 정도를 의미해요. 마찰계수가 작을수록 마찰력이 작아져 더 쉽게 미끄러지죠. 그는 바나나 껍질을 측정기에 올려두고 발로 밟아 미끄러지는 실험을 100번 넘게 진행했답니다. 그 결과, 0.066이라는 마찰계수 수치가 나왔어요. 또 껍질을 벗긴 바나나는 0.412라는 마찰계수가 측정됐죠.

숫자만 보면 얼마나 미끄러운지 잘 모르겠죠? 마부치 교수는 미끄러운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비교 실험을 진행했는데요. 사과와 귤의 마찰계수는 0.198이 나왔고, 눈 위에서 스키를 탈 때 마찰계수는 0.05로 나왔답니다. 바나나 껍질을 밟으면 눈 위에서 스키를 타는 것만큼 미끄럽다는 뜻이죠. 마부치 교수는 이 실험으로 미국 하버드대 과학 잡지사 'AIR(에어)'가 개최한 시상식에서 물리학 분야 '이그노벨상(Ig Nobel Prize)'을 받기도 했죠. 이 상은 기발한 연구나 유쾌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수여된답니다.